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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차별과 혐오에서 희망을 보다[클래식의 품격/노혜진의 엔딩 크레디트]

노혜진 스크린 인터내셔널 아시아 부국장
입력 2022-01-25 03:00업데이트 2022-01-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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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별세한 미국의 배우 시드니 포이티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노먼 주이슨 감독의 ‘밤의 열기 속으로’(1967년)이다. 1968년 아카데미 작품상, 각색상 그리고 남우주연상 등 5개 부문 수상작이다. 주연상은 동료 로드 스타이거가 탔지만, 소위 말하는 ‘투 톱’ 영화다.(포이티어는 몇 년 전 ‘들백합’이라는 영화로 흑인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이미 한 번 탄 상태이기도 했다.) 포이티어 하면 이 영화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주의가 역력하게 나타나는 이야기가 포함돼 있어 그럴 수 있지만, 작품 자체가 워낙 강렬하게 잘 만들어진 미스터리 영화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레이 찰스가 부르는 주제가 ‘밤의 열기 속으로’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영화는 미시시피주의 작은 마을에서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우연히 그곳에서 기차를 갈아타려고 기다리고 있던 버질 팁스(포이티어)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고 경찰서로 연행된다. 마을 보안관 길레스피(스타이거)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바라보지만 그가 사실 필라델피아에서 잘나가는 강력계 형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수사 협조를 요청한다.

지역에서 공장을 짓고 있던 부유한 북부 사업가가 죽은 것이다. 공장주를 가장 싫어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인 지역 유지 엔디코트가 의심받게 된다. 목화 농장에서 흑인들을 노예 시대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착취하고 있는 입장이라 공장에 다른 일자리가 생기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팁스가 길레스피와 함께 찾아가 추궁하자 엔디코트는 팁스의 뺨을 때린다. ‘어디 감히 흑인 주제에 나한테…’라는 태도였지만 팁스는 1초도 서슴지 않고 도로 엔디코트의 뺨을 갈긴다.

이 지역 백인들은 아무리 못나고 못살아도 흑인들보다 자기네가 더 존엄하다는 의식으로 산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흑인을 총으로 쏘고 정당방위라 했을 보안관들과 달리 길레스피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자기 같은 백인들도 몸을 낮추어 눈치 보는 지역 유지의 뺨을 때린 것이 대단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엔디코트가 시킨 마을 청년들이 팁스를 죽이려 들자 길레스피는 더욱 바빠지기도 한다.

영화는 무덥고 지리멸렬한 미시시피의 분위기와 긴장감 높은 상황에서 배우들의 얼굴 근육 움직임 하나하나를 잡아내는 것이 인상적이다. 보고 나면 장인이 여러 명 정성스럽게 만든 한 끼 식사를 든든하게 먹고 나오는 기분이 든다. 차별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에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차별과 혐오가 인간의 가장 저열하고 야만적인 부분이라면 장인들의 능력과 사랑으로 이뤄진 이런 예술 작품이 인간의 가장 고상하고 문명화된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노혜진 스크린 인터내셔널 아시아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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