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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오늘과 내일/이철희]푸틴이 연 ‘공포의 도박판’ 기웃대는 김정은

입력 2022-01-20 03:00업데이트 2022-01-2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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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가 해결 낳는다’는 마피아식 치킨게임
신냉전 편승 北 도발, 한반도 불안 키운다
이철희 논설위원
“미국에선 사업상 분쟁이 생기면 으레 변호사를 고용하죠? 법원으로 가면 통상 수개월이 걸리고 그만큼 변호사비만 쌓이죠. 러시아에선 대개 상식에 따라 해결됩니다. 큰돈이 걸린 분쟁이 나면 양쪽은 대표들을 만찬에 내보내죠. 모두 무장한 채로 말입니다. 피비린내가 진동할 가능성에 직면하면 양측은 합의 가능한 해법을 찾습니다. 공포는 상식의 기폭제죠.”

과거 여러 미국 대통령의 지정(地政)전략 자문을 맡았던 해럴드 맘그렌(87)이 최근 한 기고문에서 소개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1992년 발언이다.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출신의 젊은 야심가 푸틴이 30년 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밑에서 일하던 시절 자신에게 했던 얘기에서 마피아 보스 같은 본능을 읽었고, 그것은 요즘 우크라이나 침공을 위협하며 미국과 대결하는 푸틴의 벼랑 끝 치킨게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난 몇 개월에 걸쳐 우크라이나 국경에 10만 명 가까운 병력을 배치해놓고 푸틴이 미국과 그 서방 동맹에 내놓은 요구사항은 30년 전 옛 소련의 세력권을 복원할 테니 그걸 문서로 보장하라는 것이다. 수용 불가능한 조건을 내밀어 침공의 구실로 삼겠다는 최후통첩성 협박이다. 러시아는 인근 벨라루스에서 합동 군사훈련을 준비하는가 하면 대규모 해킹 공격과 가짜 뉴스 유포, 거짓 피격사건 공작까지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쟁’에도 들어갔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어떻게 끝날지는 알 수 없다. 당장 푸틴의 의도는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그의 야릇한 눈빛 속에 감춰져 있다. 서방과의 협상에 나선 러시아 측 대표도 그 속내를 모를 것이라느니, 아니 푸틴 자신조차 결정을 못 내렸을 것이라느니, 중(重)기갑전력 작전을 위해 땅이 꽁꽁 얼기를 기다리고 있다느니, 우크라이나 점령 이후 출구 없는 ‘전쟁의 늪’에 빠질 것을 푸틴도 모를 리 없다느니 온갖 추측성 전망만 무성하다.

어쨌든 푸틴은 선제 도발자의 이점을 누리고 있다. 고도의 정치심리전이 노리는 것은 상대를 열 받게 하거나 겁먹게 만드는 것. 미국은 그런 노림수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수세적 처지에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다. 병력 파견 같은 맞대응 대신 꺼내든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나 금융·무역 제재 경고는 나약하게 비칠 뿐이다. 다만 미국과 동맹들이 점차 결의를 모으고 있는 만큼 푸틴이 주도하는 시간이 마냥 지속되진 않을 것이다.

푸틴의 마피아식 도발로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패권도전자 중국보다 질서교란자 러시아의 도전에 먼저 맞닥뜨렸다. 러시아를 이용한 중국 견제, 즉 중-러 갈라치기는 환상이었음도 드러났다. 오히려 중-러의 연대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응원과 경계 사이에서 향후 대만 공략의 학습기회로 여기며 관전하고 있다. 내달 4일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회식은 세계 양대 스트롱맨 푸틴과 시진핑의 밀월을 과시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짙어지는 신냉전 기류는 다른 독재자들에게도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당장 카자흐스탄의 독재자는 반정부세력 진압을 위해 러시아 군대를 불러들였다. 북한이라고 가만있을 리 없다. 김정은은 새해 벽두부터 각종 미사일을 연거푸 쏘아 올렸고, 국제 제재를 무력화하는 중-러의 비호 아래 더 큰 도발의 호기로 삼을 태세다. 냉전시대 첫 열전지대, 탈냉전시대 마지막 냉전지대 한반도의 불안 요인은 커지고 있다. 바짝 긴장하고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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