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반복에서 벗어나기[클래식의 품격/노혜진의 엔딩 크레디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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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이 도래한 이후로 영어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눈에 띄게 많이 본 말 중 하나가 “Groundhog Day(그라운드호그 데이)”다. 우리나라에서 ‘사랑의 블랙홀’(1993년)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빌 머리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영어 원제다. 이 말은 원래 마멋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매년 2월 2일 성촉절을 뜻한다. 성촉절은 우리의 경칩과 비슷한데, 마멋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 다시 동면에 들어가게 돼 겨울 날씨가 6주 더 계속된다는 설이 있다. 한편, ‘사랑의 블랙홀’에서처럼 (주로 지겹게) 변함없이 반복되는 일을 일컫는 표현이 되기도 했다.

기상 캐스터인 주인공 필은 성촉절 의식으로 유명한 펑크서토니라는 마을에 취재차 간다. 프로듀서 리타(앤디 맥다월)와 촬영기사 래리(크리스 엘리엇)가 동행하는데 하루 전 도착해 다음 날 아침 행사를 취재하고 떠나는 일정이다. 작은 방송국의 일에 투덜거리기만 하는 필은 매년 마멋을 데리고 법석 떠는 행사를 지겹게 생각하고 대충 빨리 일을 처리하고 떠나려 한다. 그런데 폭설이 몰아쳐 하루를 더 묵게 된다.

다음 날 아침 6시가 되자, 필의 라디오에선 전날과 똑같은 소니 앤드 셰어의 노래 ‘I Got You Babe’와 진행자의 멘트가 흘러나온다. 필에겐 경악스럽게도 2월 2일 성촉절의 일들이 그대로 반복된다. 펑크서토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타임루프에 걸린 그는 그곳에서 온갖 말썽과 사고를 일으키지만, 매번 다음 날 아침 6시면 라디오에선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며 하루가 반복된다.

이후 그는 똑같은 날을 수없이 반복해서 살지만, 그 하루의 패턴을 익혀 사람의 목숨도 구하고, 피아노 실력을 늘리고, 얼음 조각을 만들기도 하고, 하룻밤 상대로 유혹하려 했던 리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하루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선하고 즐거운 일을 훌륭히 해낸 후 자고 일어난 어느 날 아침, 필은 드디어 루프에서 풀려나게 된다.

요즘 팬데믹 속에 많은 이들이 활동이 제한되다 보니 하루하루가 늘 똑같다는 의미로 “Groundhog Day”라는 말을 많이 썼다. 방역 조치가 해제된 후 다시 확진자 수가 급증해 엄격한 방역 조치가 반복될 때와 같은 경우에도 #GroundhogDay가 유행했다.

‘사랑의 블랙홀’에서는 주인공이 성실히 발전을 꾀할 때 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K방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온 국민이 성실히 방역에 임한 한국에서는 이제 ‘위드 코로나’ 시대가 시작된다고 한다. 루프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어도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을지 기대되는 요즘이다.



노혜진 스크린 인터내셔널 아시아 부국장


#코로나19#팬데믹#지루한 반복#위드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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