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보이스피싱은 공감이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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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이스’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핵심 브레인 곽 프로. 이 악당은 “보이스피싱은 상대의 무식과 무지가 아닌 희망과 공포를 파고 드는 것”이라며 “그래서 보이스피싱은 공감”이라고 주장한다. CJ ENM 제공
영화 ‘보이스’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핵심 브레인 곽 프로. 이 악당은 “보이스피싱은 상대의 무식과 무지가 아닌 희망과 공포를 파고 드는 것”이라며 “그래서 보이스피싱은 공감”이라고 주장한다. CJ ENM 제공
[1] 우리가 당연한 듯 사용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불성설인 관용적 표현들이 많아요. 우선 전시장에 놓인 ‘눈으로만 보세요’라는 팻말이에요. ‘보기만 하고 만지지는 말라’는 뜻이지만, 어법상으론 완전히 그릇되었어요. 눈으로‘만’ 보라고 했으니, 엉덩이나 배꼽이나 사타구니로는 보지 말고 눈으로만 보란 뜻이라고요. 이게 말이 되어요? 또 있어요. 연예 기사에서 심심찮게 쓰는 ‘남몰래 기부’라는 표현이에요. 아니, ‘남몰래’ 기부를 했다는데 어찌하여 쓰는 놈은 알고 쓴단 말이에요? 일상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어구들로 차고 넘치다 보니, 영화 속 똑떨어지는 명대사들이 더욱 우리의 마음속에 별의 순간처럼 와서 박히는지도 모르겠어요.

[2] 그거 아세요? 영화나 드라마의 명대사 중 의외로 많은 경우가 악당의 입을 통해 나온다는 사실을요. 아마도 착한 놈보단 나쁜 놈들이 인간 심리를 더 치열하게 연구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말 같지 않은 생각도 해보아요. 아니면, 인생은 부정적이고 삐딱하게 바라볼 때 그 본질이 제대로 포착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요. 갱스터 영화의 전설 ‘대부’(1972년)만 해도 그래요.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敵)은 더 가까이 둬야 한다” 같은 기똥찬 대사들도 전부 마피아 수장 돈 콜리오네(말런 브랜도)로부터 나온다고요. 다만 이 조폭 두목은 지나치게 가정적이고 가슴 따스하고 신의가 깊고 과묵해서 착한 놈처럼 보인다는 게 큰 문제지만요.

[3] 이번 추석연휴에 흥행 1위를 한 영화 ‘보이스’에도 착한 주인공을 잡아먹을 만큼 강렬한 악당 하나가 나와요. 보이스피싱 조직의 핵심 브레인인 곽 프로(김무열)란 놈이에요. 아파트 중도금 7000만 원을 보이스피싱으로 날린 전직 형사 서준(변요한)이 중국에 있는 조직의 심장부로 침투한다는 단순하지만 우직한 이 영화에서 곽 프로는 폐부를 찌르는 명언들을 가래침처럼 칙칙 뱉어내요. 소위 ‘삥땅’을 치다 걸린 직원을 응징하기에 앞서선 탁월한 라임(rhyme)을 갖춘 이런 놀라운 비유를 구사한다니까요? “니 욕심에 인플레이션 나면, 니 인생엔 아이엠에프(IMF) 나는 거야!”

곽 프로의 리얼리티 넘치는 대사를 곱씹어 보면, 왜 우리가 눈뜨고 당하는지를 절감하게 되어요. “보이스피싱은 공감이야”라는 이놈은 이 범죄를 단지 ‘속이는 것’을 넘어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 정의해요. “보이스피싱은 무식과 무지를 파고드는 게 아니야. 상대의 희망과 공포를 파고드는 거지. 이 차이가 1억이냐 10억이냐를 가르는 거야.” 어때요? 뇌가 아닌 심장을 공략하는 보이스피싱의 잔인한 본질이 드러나지요?

그래서 곽 프로는 “‘구라’의 기본은 팩트”라고 강조해요. 공감은 설득력에서 나오고, 설득은 팩트에서 비롯된다는 거죠. “건강보험료가 3.2% 인상되고 장기요양보험료가 10.2% 올라 지금 국민들이 ×나게 돌아 있단 말이야. 환급해 주겠다고 하면 바로 물어버리지.” 맞아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요.

[4] 넷플릭스 한국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미국 1위에 오른 ‘오징어 게임’ 속 악당은 코로나19 이후 더욱 극심해진 빈부격차로 박탈감에 시달리는 우리의 헛헛한 마음을 자극해요. 빚에 쪼들리고 삶의 희망을 잃은 벼랑 끝 456명이 자신들의 목숨 값 1억 원씩 총 456억 원의 상금을 놓고 최후의 1인이 되기 위해 피 칠갑 생존게임에 불나방처럼 뛰어든다는 이 드라마에는 살인게임을 설계한 배후인물이 막판에 등장해요. 갑부인 이 악당은 게임을 계획한 이유를 이런 촌철살인으로 설명하지요.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인생이) 재미가 없다는 거야. 돈이 너무 많으면 아무리 뭘 사고 먹고 마셔도 결국 다 시시해져 버려.”

돈이 넘쳐나는 극소수는 가난한 다수의 목숨 값을 판돈 삼아 게임을 벌이고, 인생 막장에 다다른 한계적 존재들은 살인 체스판의 말(馬)로 자신을 내놓는 아비규환의 무간지옥이야말로 각자도생, 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얼룩진 2021년의 대한민국과 뭐 그리 다를 바 있겠느냔 말이지요.

[5] ‘보이스’의 곽 프로는 이런 유식한 대사를 뚫린 입으로 내뱉으며 우리를 환장하게 만들어요. “어차피 인간은 남의 고통을 먹고 사는 거야. 기왕 남의 돈 먹는 거 맛있게 먹어야지. 니체가 뭐라고 말했어? 지금 웃는 자, 최후에도 웃으리라. ×발!” 우리 국민의 목에 빨대를 꽂고 쪽쪽 맛나게 빨아 드시는 분들이 지금도 웃고 최후에도 웃게 되는 불변의 세상에 가슴이 새삼 미어져와요. 현실은 영화와 달리 나쁜 놈이 주인공인 새드엔딩이니까.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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