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속 눈물에 ‘아니꼽다’ 한 홍대용[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21-08-02 03:00수정 2021-08-02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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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그 옛날 천주당에 가서 그림을 보다 사람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 법이라는데, 간혹 외국 여행이 그 변화의 계기를 줄 때가 있다. 외국 여행이 쉽지 않던 조선시대에도 공식적인 외국 여행 기회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일이었다. 17세기에는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 현지 구경을 해보겠다는 열망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오랑캐라고 멸시해오던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킨 데 대한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 문화야말로 탁월한 ‘보편’ 문명이라고 주장하는 조선 중화주의가 팽배했으니, 딱히 직접 가 보고 싶은 심정이 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직접 가 보지 않는 한, 변화의 계기도 오기 어렵다.

하루빨리 망해 버리기를 바랐던 청나라는 망하기는커녕, 18세기에는 그 발전상이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청나라의 발전이 괄목할 만하다는 풍문을 들은 조선의 ‘힙스터’들은 두 눈으로 직접 오랑캐의 발전상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록 더러운 오랑캐이나 중국을 차지하여 100여 년 태평을 누리니, 그 규모와 기상이 어찌 한 번 보암직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수행원 자격으로 사신단을 따라간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북경의 번화한 문물에 감탄하고 조선의 개혁을 주장한 그룹이 이른바 ‘북학파(北學派)’다. 그 유명한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같은 이들이 그 일원이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말한다. “우리 조선 선배들은 세계 한 모퉁이의 구석진 땅에서 편협한 기풍을 지니고 살고 있다. 발로는 모든 것을 가진 중국 대지를 한번 밟아보지도 못했고, 눈으로는 중국 사람을 한번 보지도 못했다.”

북경에 간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꼭 가 보고 싶어 했던 곳이 천주당(天主堂)이다. 당시 천주당은 그야말로 외국 중의 외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인에게 북경도 외국이었지만, 천주당은 그 북경 안에서도 서양의 종교와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정말 신기한 곳이었던 것이다. 조선 지식인들은 자신의 북경 체험을 연행록(燕行錄)이라고 부르는 여행기에 담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들이 천주당에서 서양 과학 기물, 책, 그림들을 보고 얼마나 경이로워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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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원근법을 사용해서 핍진한 느낌을 주는 서양 회화에 큰 인상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 “얼핏 보고는 곧 살아 있는 개라 여기다가 다가와서 자세히 본 후에야 그림인 줄 알았다.” “가장 이상했던 것은 구름을 헤치고 얼굴을 드러낸 자가 두어 장(丈) 정도 깊은 곳에 있는 듯 보였던 것이다.” “필법이 정교하고 기이하여 중국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연행사와 북경 천주당’)

북학파 지식인 중에서 가장 먼저 북경 여행을 한 사람이 홍대용이다. 그가 천주당 내 종교화를 보고서 남긴 기록이 흥미롭다. “서쪽 벽에는 죽은 사람을 관 위에 얹어 놓고 좌우에 사내와 여인이 혹 서고 혹 엎드려 슬피 우는 모양을 그렸으니, 소견에 아니꼬워 차마 바로 보지 못하였다. 왕가에게 그 곡절을 물으니 왕가가 이르기를 ‘이는 천주가 죽은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을병연행록’)

홍대용이 ‘을병연행록’에서 남긴 기록을 보면 그가 천주당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처형 이후 슬픔을 묘사한 종교화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피에타’(1490년). 출처 위키미디어
프랑스 출신 화가 얀 호사르트의 ‘애도’(1520년대). 출처 웹 갤러리 오브 아트(WGA)
홍대용은 종교화 중에서도 무슨 그림을 본 것일까? 그리스도교 미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홍대용이 언급한 그림이 그리스도 십자가 처형 이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스도 십자가 처형 이후 슬픔의 묘사는, 십자가에서 내림(Descent from the Cross), 피에타(Piet‘a), 애도(the Lamentation), 매장(the Entombment) 등으로 나뉜다.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피에타’, 얀 호사르트의 ‘애도’, 알브레히트 뒤러의 ‘매장’을 비교해보자. 이 중에서 “죽은 사람을 관 위에 얹어 놓고”에 해당하는 묘사를 포함한 것은 ‘매장’뿐이다.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매장’(1512년).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매장’ 그림을 본 홍대용의 소감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소견에 아니꼬워 차마 바로 보지 못하였다”라고 한 부분이다. 사람들이 한창 슬퍼하는 그림을 보고, 그 슬픔에 공감하지는 못할망정 왜 아니꼽다고 한 것일까? 이는 단순히 홍대용 개인의 성격을 반영한 말일까? 아니면, 슬픔을 안으로 삼키는 자기 절제력을 촉구하고 싶어서 한 말일까? 그도 아니면, 감정의 조절을 강조한 ‘주자학적’ 조선 문화 특징을 드러낸 말일까?

예술작품에서 감정의 묘사는 단순히 예술가 개인의 취향 문제에 그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껏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묘사한 조선시대 그림이나 조각은 찾기 어렵다. 반면에 플랑드르 회화나 중세 부르고뉴 조각에서는 한껏 눈물 흘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예술적 모티브였다. 이처럼 감정의 묘사는 서로 다른 문화적 양상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금까지 ‘보편성’을 자임하던 문화도 타 문화에 접했을 때 기껏해야 또 하나의 ‘특수한’ 문화였음이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 북경 여행은 홍대용에게 타 문화를 직접 접해 볼 소중한 계기를 제공했고, 결국 그것을 계기로 그의 세계관은 크게 바뀌게 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변화#북학파#홍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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