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주술사들[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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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이후 5년째 기본소득 논쟁
노동시장 개혁에는 왜 입 다무나

박용 경제부장
박용 경제부장
37년 전 미국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는 지금 봐도 섬뜩하다. 2029년 미래에서 온 살인로봇 ‘T-800’의 위협에서 주인공을 지키려고 역시 미래에서 온 인류가 맞서 싸운다. 로봇이 초래한 핵전쟁, 살인을 서슴지 않는 무자비한 사이보그는 로봇이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공포를 각인시켰다. 인류를 핵전쟁으로 몰고 간 ‘스카이넷’이 인간이 발명한 인공지능(AI) 시스템이라는 대목에선 소름이 돋는다.

기계에 대한 인류의 두려움은 꽤 오래됐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긴 영국 방직공들은 방직기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 운동)’을 벌였다. 물리학자가 사람 모양의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어 만든 괴물이 등장하는 영국 작가 메리 셸리의 괴기 소설 ‘프랑켄슈타인’도 이 무렵 나왔다.

최근 기본소득 논쟁은 이런 테크노포비아(기술공포증)에서 비롯됐다. AI와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하는 ‘일자리 없는 미래’는 인류의 숙명이니 받아들이고, 정부가 국민에게 최소 생활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게 미 실리콘밸리에서 나온 기본소득 아이디어다. 그걸 수입해 2017년 대선 쟁점으로 만들고 코로나19 위기에서 재난지원금으로 포장해 되네 마네 하는 게 한국의 기본소득 논쟁이다.

‘일자리 터미네이터’라는 비난과 ‘제2의 러다이트 운동’의 표적이 되고 싶지 않은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이야 정부에 책임을 떠넘기기 좋은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전에 일자리 없는 미래를 피할 대책을 내놓아야 할 정치인들이 한술 더 떠 당장 해보자고 덤비는 건 무모하다.

세계화와 자동화로 중산층 일자리가 줄고 있다지만 ‘기본소득’이라는 백기를 들 때는 아직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자동화 가능성이 70% 이상인 일자리가 회원국 전체 평균(14%)보다 낮은 약 10%다. 당장은 신기술이 한국에서 급격한 고용 감소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OECD의 판단이다. 로봇과의 일자리 전쟁에서 반격할 시간이 우리에겐 남아 있다는 얘기다.

일자리는 생계유지 도구만도 아니다. 청년들이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수단이다. 올해 국방비(52조 원)의 약 6배인 300조 원을 투입해 전 국민에게 월 50만 원의 기본소득을 쥐여 줘도 제대로 된 일자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폭등하는 집값과 취업난 속에서 좌절하는 청년들의 분노를 달랠 길이 없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18일 “코로나19 위기가 끝나더라도 수백만 개 일자리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기업 출장의 20%가 영원히 사라지고 노동자의 20%가 재택근무를 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미 미 실업자의 3분의 2가 직종 변경을 검토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새 일자리와 전직 교육, 직업 훈련프로그램이 필요해진다는 걸 뜻한다.

OECD는 신기술의 위협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생산성 차이가 큰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고 세계적으로 실업이 급증하는 코로나19 위기에도 파업하는 대기업 노조가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새 시대에 맞는 노사협력 모델이 절실하다. 우리 대학과 직업훈련 프로그램은 어떤가. 새 일자리로 가는 길을 청년들에게 열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해묵은 노동시장 구조개혁 과제는 놔두고 ‘기본소득 될 때까지’를 무한 반복하는 건 비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겠다는 주술사처럼 터무니없다. 진짜 ‘일자리 터미네이터’는 로봇이 아니다. 피할 수 있는 미래를 피하지 못하게 하고, 가능한 해법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기본소득#터미네이터#노동시장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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