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가 만드는 세계 최고의 기업[광화문에서/김현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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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산업1부 차장
김현수 산업1부 차장
지난주 일요일 아침 기자들은 고속도로에서, 단풍이 물든 산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별세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출근했다. 고 이 회장이 쓰러진 2014년 이후 틈틈이 기사를 준비했지만 막상 닥치니 취재할 일이 산더미였다.

장례기간 내내 고인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통화하고, 글을 받고, 과거 인터뷰와 에세이를 꼼꼼히 읽으면서 고인을 가장 잘 표현할 한 단어가 생각났다. ‘덕후’(일본어 오타쿠를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 우리말 조어)였다.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선문답”, “독특함”, “이해하기 어려움”과 같은 표현을 썼는데, 이와 관련된 일화들이 거의 ‘집착에 가까운 몰입’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영결식 추도사를 맡은 김필규 전 KPK통상 회장은 통화에서 “고인은 한번 꽂히면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고 했다. 그는 “고인의 방에 가본 은사님이 ‘부잣집 아들이니 경영학 책이나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방에 TV, 라디오 같은 전자제품이 꽉 차 있었다’고 하더라. 일찍부터 필생의 사업이 될 전자제품에 꽂혀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고 이 회장이 1997년에 낸 에세이집 곳곳에서도 이런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초등학생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외로웠던 고 이 회장은 영화와 전자제품 분해에 몰입하며 보냈다. 영화로는 경영 비전을, 전자제품 분해로는 반도체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는 ‘개를 기르는 마음’편이다. 일본 시절 혼자 있다 보니 개가 좋은 친구가 됐다고 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 에세이에서도 특유의 몰입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세계견종협회가 진돗개를 ‘확실한 순종이 없다’며 한국 토종개로 등록해주지 않자 고인은 1969년 진도로 내려가 진도개 30마리를 사들인 뒤 사육사와 함께 이를 150마리로 늘려 순종을 만들었다. 고인은 “나는 아무리 취미생활이라도 깊이 연구해서 자기의 특기로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삼성이 시각장애인 안내견 학교도 운영했으니 요즘 말로 ‘덕업일치’(좋아하는 것을 일로 하는 것)를 이룬 것이다.

집착에 가까울 만큼 몰입했다는 점, 남들이 이해 못 해도 더 큰 비전으로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닮았다. 그도 음악에 심취한 경험이 아이팟과 아이튠스로 만개했고, 디자인 완벽주의가 애플의 핵심 경쟁력이 됐다. 세대도, 주요 제품도, 경영 스타일도 다르지만 애플과 삼성이 2010년대 이후 세계 테크산업의 거두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탁월함의 바탕은 집착과 몰입이 아니었나 싶다.

아쉬운 것은 잡스와 달리 고 이 회장에 대한 기록이 다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잡스는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에게 자신의 평전을 쓰게 했다. 아이작슨은 잡스와 주변인 100여 명을 인터뷰해 900페이지에 달하는 전기를 냈고, 많은 이들이 그의 다각적인 면모를 이해하게 됐다. 하지만 고 이 회장은 200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끝으로 기록을 멈췄다. 반(反)기업 정서가 커지면서 기업인은 솔직한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게 미덕처럼 남았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공과를 떠나 고인의 경영 철학에 대한 재평가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래서 반갑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별세#이건희 회장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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