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나무 도장[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48〉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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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어두운 역사를 말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적으로 말하자니 너무 폭력적이고 침묵하자니 너무 무책임해 보인다. 권윤덕 작가의 어린이용 그림책 ‘나무 도장’은 이런 고민에서 시작된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어머니와 딸이 등장한다. 두 사람이 혈연관계가 아니면서 모녀가 된 사연이 기구하다. 어머니는 4·3의 와중에 좌익이라는 누명을 쓰고 가족을 모두 잃었다. 혼자라도 살아남은 것은 친정 오빠가 경찰이어서 가능했다. 그런데 낯선 아이가 그녀의 딸이 된 것도 오빠 때문이었다. 그가 군인들과 함께 한라산 동굴에 숨은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냈을 때였다. 어미의 품에 매달린 아이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아이의 눈길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나중에 지서에 돌아가서도 그 눈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아이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날이 어둑해지자 여동생과 함께 밭담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죽은 어미의 치마폭에 싸여 살아 있었다. 그날 밤, 경찰관과 여동생은 잠든 아이를 보면서 밤새도록 울었다. 경찰관은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아이의 손에 들린 나무 도장은 그들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아이의 어미는 도장을 아이의 손에 쥐여주면서 갖고 있으면 아빠를 만날 수 있으니 꼭 쥐고 있으라고 했을 터였다. 경찰관과 여동생은 도장 주인을 찾아보았지만 아이 아빠와 가족들은 죽고 없었다. 오누이가 가족을 잃은 아이에게 엄마와 외삼촌이 된 것은 그래서였다. 그들은 매년 아이를 데려온 날이면 제사를 지낸다. 그날이 아이의 어미가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니까.

가슴이 아려 오고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따뜻한 이야기다. ‘잘잘못을 넘어선 들판/나, 그곳에서 그대를 만나리라’라는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시구처럼, ‘나무 도장’은 이념이나 옳고 그름을 넘어선 지점을 택해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친다. 아픈 역사를 들추면서도 인간애를 이야기하다 보면 상처도 아물 것이다. 언젠가는.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나무 도장#어두운 역사#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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