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벤섬의 셰익스피어 [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47〉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로벤섬은 예전에는 감옥섬이었다. 그곳에 수용된 정치범들은 한 권의 책만 갖고 있을 수 있었다. 정치적인 내용은 허용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 전집이 허용되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그런데 가족이 보낸 힌두교 그림엽서를 전집 표지에 붙여 힌두교 경전으로 위장한 사람이 있었다. 1972년부터 1978년까지 복역했던 소니 벤카트라스남이라는 인도계 아프리카인이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동료들에게 전집을 주면서 각자 좋아하는 대목에 표시를 하고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그들 중에는 넬슨 만델라도 있었다. 만델라는 1977년 12월 16일 ‘줄리어스 시저’의 한 대목에 표시를 하고 서명을 했다. 꿈자리가 불길하다며 원로원에 가지 말라는 아내의 말에 시저가 답변하는 내용이었다. ‘겁쟁이들은 죽기 전에 여러 번 죽소. 그러나 용감한 자는 한 번만 죽음을 맛보는 법이오.’ 누구나 결국 죽게 되어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전체적인 맥락과는 별개로 만델라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저의 용기를 높이 샀다. 27년에 걸친 수감 생활에서 그에게 필요했던 건 용기였다.

만델라를 비롯한 정치범들은 낮에는 불볕이 내리쬐는 채석장에서 석회암을 캐는 사역을 했고 밤이면 책을 읽었다. 문자를 모르던 사람들도 글을 깨치고 책을 읽었다. 감옥은 일종의 학교였고 셰익스피어 전집을 비롯한 책들은 훌륭한 선생이었다. 이제는 감옥 대신 역사박물관이 들어선 로벤섬의 셰익스피어 전집은 백인 정권의 폭력에 맞선 아프리카인들의 용기를 오늘도 증언한다.

그런데 만델라가 셰익스피어 전집에 서명을 했던 12월 16일은 사실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치욕의 날이었다.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1838년에 줄루족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약속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자 12월 16일을 국경일인 ‘화해의 날’로 정했다. 그는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복수가 아니라 화해와 용서로 응답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남아프리카공화국#로벤섬#감옥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