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대하는 경이원지의 지혜[오늘과 내일/신석호]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입력 2020-06-26 03:00수정 2020-06-2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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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을 외견상 국가로 대하되 너무 가까이하면 화 부른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꽃다운 나이의 젊은 46용사가 숨을 거두기 직전인 2010년 3월 초. 북한에 다녀온 인사가 북측 당국자의 경고를 기자에게 전했다. “8일부터 시작되는 키리졸브 한미 연합 군사훈련 기간 동안 남한과 미국의 전투기가 비록 공해상일지라도 북측을 향해 기수를 돌릴 경우 이를 공격으로 간주하고 대응할 것이다.” 머지않아 군부가 할 일을 정반대로 재구성해 귀띔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3월 26일 밤 전투기가 아니라 해군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했다. 동쪽 하늘이 아니라 서쪽 바다였고, 키리졸브 연습이 끝나고 독수리훈련이 시작된 때였다. 북한 당국자는 최고지도부가 왜 화났는지도 설명했다. “우리는 금강산과 개성 관광 재개를 위해 노력하고 개성공단 근로자나 동해상으로 월경한 ‘800연안호’를 석방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남측은 필요한 것들만 얻어 위기만 모면하려고 진정성 있는 대화를 진행하지 않았다.”

‘진정성 있는 대화’란 2009년 가을 정상회담 논의였다. 2008년 8월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죽기 전 아들 김정은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자 김양건 통전부장 등을 조문단으로 보내 ‘대남 수금 작전’에 돌입했다. 이어 당국 간 정상회담 논의가 시작됐다.


돌이켜보면 이명박 정부는 ‘북한을 끌어냈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라 정중히 거절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김양건을 만난 임태희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국군포로 일부의 고향 방문과 대북 인도적 지원을 골자로 한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양해각서’에 덜컥 서명했고,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이 국군포로 관련 요구는 더 키우고 인도적 지원 요구를 거절했다. 김정일에게 양해각서를 보고하고 재가를 받은 김양건은 “대기업이 중소기업 후리듯이 하느냐”며 거세게 항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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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대화의 샅바를 잡았다가 오히려 군사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불편한 시나리오는 10년 뒤인 지금 반복되고 있다. 애초에 비핵화 의지가 없었던 북한이 먼저 ‘미국과 대화하고 싶으니 다리를 놔 달라’고 했는지, 문재인 정부가 먼저 ‘미국과 대화하게 해 주겠다’고 공작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모든 외교적 춤판(fandango)은 한국이 만든 것이었고, 이는 김정은이나 우리(트럼프)의 진지한 전략보다는 한국의 통일의제에 더 연관된 것’이었다며 두 번째 가설에 무게를 실었다.

볼턴의 인식이 ‘통일의제’이지 사실은 문재인 정권의 생존이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 탄핵 파동으로 준비 없이 정권을 잡은 뒤 북한과의 화해무드는 좋은 통치 카드였다.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이용한 것은 역대 정부가 모두 같지만 이번엔 부작용이 좀 심한 것 같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못한 ‘평양 연설’의 호사는 문재인 정부의 발목을 잡는 형국이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생전 북한을 대하는 태도로 강조했던 ‘경이원지(敬而遠之·겉으로 공경하는 체하면서 멀리함)의 지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황 전 비서는 “진짜 공경하라는 게 아니라 외견상 국가로 대접하는 척은 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상 우리 영토요 국민이지만 김씨 일가가 지배하고 있고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는 점은 인정해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은 피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격화된 김씨 일가의 시대착오적인 수령 절대주의 세습 독재 체제를 가까이하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고 경계했다.

이명박 정부는 멀리하려 했지만 자존심을 건드린 경우라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자존심까지 버리고 너무 가까이 간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 아닐까.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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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원지#천안함 폭침 사건#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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