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과 삼지창 모자, 그리고 비밀대화방[오늘과 내일/정원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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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6000억 원 피해에도 역대급 도피 생활
‘어마 무시한’ 정-관계 로비 실체 밝혀야

정원수 사회부장
정원수 사회부장
잠적 100여 일 만인 24일 얼굴이 처음 공개된 라임자산운용의 전주(錢主)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46)이 썼던 모자엔 알파벳 7글자가 선명했다. VERUTUM. 낯선 브랜드여서 상호를 찾아보니 면세점 등에서 구할 수 있는 개당 8만 원 안팎의 모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들의 눈에 더 띌 텐데, 지명수배자가 잠깐 외출할 때 굳이 고가의 이 모자를 착용해야 했을까. 투자자의 돈을 빼돌려 유흥주점 등에서 흥청망청하던 김 전 회장이 호화 도피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의혹에 설마 했는데, 이 모자 가격을 확인하고 의구심이 사라졌다.

모자 제조사의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브랜드 이름은 그리스 여신들이 몸에 지니고 다녔던 삼지창 모양의 무기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부적처럼 쓰고 다니던 ‘삼지창 모자’에도 불구하고 김 전 회장의 도피 행각은 최근 중단됐다. 그와 함께 숨어있던 라임 이종필 전 부사장(42), 신한금융투자 심문섭 전 팀장(39)까지 이른바 라임 사태 3인방이 동시에 체포됐기 때문이다.

이들의 체포 과정은 첩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무엇보다 라임 사태 전반을 6개월 이상 추적한 검찰이 아닌 경찰이 이들을 ‘일망타진’한 것부터가 반전이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수원여객 횡령 사건으로 김 전 회장의 오른팔로 불린 A 씨를 구속 수감했는데, 김 전 회장의 또 다른 측근 B 씨가 A 씨의 경찰 진술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A 씨 가족에게 접근한 것이다. 김 전 회장은 19일 B 씨와 서울 신촌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고, 뒤늦게 이를 파악한 경찰은 주변 폐쇄회로(CC)TV 등을 모조리 추적해 김 전 회장이 서울 성북구로 이동한 것을 알게 됐다.

20명의 전담반을 구성한 경찰은 잠복 끝에 23일 오후 9시경 골목길에서 호출한 카카오택시를 타려던 김 전 회장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김 전 회장은 곧바로 수원의 경기남부경찰청에 호송돼 조사를 받았다. 경찰도 검거 작전이 끝난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1시간 정도 조사를 받던 김 전 회장은 갑자기 이 전 부사장 등과 함께 2주 정도 숨어 지내던 2층 단독 주택의 위치를 털어놨다. 황급히 서울 성북구로 되돌아간 경찰은 주택 안에 숨어 있던 이 전 부사장 등을 체포한 뒤 이들의 신병을 라임 사태를 수사 중인 서울남부지검에 넘겼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특이한 모자를 쓴 것이나 3명이 모여 있었던 것도 그렇고, 안 잡힐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고 했다.

라임은 사모펀드로 업종을 바꾼 지 3년 만에 자산 규모 5조 원이 넘는 국내 1위 헤지펀드 회사로 급성장했다. 이번에 붙잡힌 3명은 각각 라임의 전주, 설계자, 판매자로 역할을 나눈 주연급이다. 이들 외에도 서울 명동과 강남의 사채업자, 개미투자자를 울린 전문 기업사냥꾼, 연예기획사 대표 등 주연급 조연이 많다. 법조계에선 ‘1, 2년 정도 수사해야 할 정도’ ‘형사부 검사 4, 5명으로 수사할 수 없는, 예전 같으면 반부패수사부 2, 3곳이 투입될 사안’이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아직 수사팀의 확대 개편 소식은 없다.

김 전 회장은 사업을 할 때 메시지 전달 과정 전체를 암호화하는 와츠앱, 텔레그램 등 보안 메신저를 통해 주요 인사들과 비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로비를 어마 무시하게 하는 회장님’으로 불린 김 전 회장의 로비 대상에는 분명히 정·관계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꼬리를 물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 파견 행정관을 지낸 금융감독원 팀장급 간부 외엔 아직 드러난 게 없다. 김 전 회장의 행보를 알면 알수록 평범한 월급쟁이와 소상공인의 상대적 박탈감만 커질 것이다. 수사기관은 1조6000억 원대 투자 피해의 배후를 반드시 밝혀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라임자산운용#김봉현#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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