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총선 압승, 보약 될지 毒이 될지는 文에 달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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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전문가 존중한 ‘非문재인적’ 접근이 야당福과 함께 文정권 총선 勝因
친문 덕분이라 착각하면 쇠락 자초할 것

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4·15총선은 풍랑을 만난 배 안에서 치러진 선장 신임 투표나 마찬가지였다.

선장 친위그룹들은 압도적 신임 결과에 고무돼 “역시 우리가 옳았다”며 우쭐한다. 과연 그럴 일일까.

승인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중도파 20%가 내 손을 들어준 이유다. 미증유의 폭풍우 속에서 중도파 선원들이 일단은 현 선장을 밀어준 가장 큰 이유는 야당은 더 허탕일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2개월간 배 안의 모두가 합심해서 풍랑을 헤쳐 온 데 대한 구성원들 스스로의 자부심, 즉 자신과 공동체에 대해 느끼는 대견함이 현 시스템을 긍정하고 밀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연결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코로나 대응에서 올린 승점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의 몫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 사회가 선방한 두 기둥은 신속하고 광범위한 진단검사와 시민의식이었다. 우리 사회는 직장 건강검진을 비롯한 의료 검사 시장이 급성장해 2000여 검사기관이 있다. 1980년대 병리과에서 진단검사의학과가 독립돼 전문의를 포함 1200여 명의 검사의학 전문가와 1만여 임상병리사가 양성돼 있다.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성장해온 국내 바이오업체들은 중국에서 지난해 12월 31일 첫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하고, 1월 12일 미 국립생물공학정보센터가 코로나19 유전자 염기서열을 공개하자마자 시약 개발에 착수했다. 대한진단검사의학회는 첫 확진자가 나온 1월 20일 당일 ‘코로나 TF’를 구성했다.

이 같은 민간 역량이 있어도 ‘행정과 규제’에 발목 잡히면 무용지물인데 우리에겐 2016년 메르스 사태 이듬해 도입한 신종 감염병 발생 시 새 진단 시약과 검사법의 긴급사용을 승인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질병관리본부의 적극적인 코디네이터 역할이 빛났다. 질본은 설 연휴 마지막 날 서울역 역사로 진단검사의학회와 시약 생산업체 관계자들을 불러 진단시약 긴급승인 신청을 요청했다. 통상 6개월 이상 걸리던 심사가 초스피드로 진행됐다.

그때부터 우리는 정치의 간섭이 없는 환경에서 대한민국의 전문가와 민간기관들이 얼마나 놀라운 경쟁력을 발휘하는지 목격했다. 영리를 위해서든 사명감이든 다들 밤을 새워 달려들었다.

문재인 정부는 이에 별달리 간섭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칭찬받을 대목이다. 문 대통령은 짜파구리 파티를 열거나, 섣불리 낙관적 발언을 뱉거나, 자화자찬을 해서 구설수에 올랐을지언정 뒤로 물러나 있어줬다. 사태 초기 중국인 입국 차단 문제에서 전문가 의견보다 정치를 앞세운 것을 제외하고는 전문가와 민간의 창의에 맡겨둔 것이다. 물론 사태 초기부터 언론과 전문가들이 메르스의 교훈을 상기시키며 전문가 존중과 투명한 대응을 연일 촉구한 영향도 컸을 것이다.

운도 따라줬다. 훨씬 선방하는 작은 배들도 있지만 선진국 거함(巨艦)들이 난파하는 장면들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상대적으로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최근 57%까지 치솟은 문 대통령 지지율은 불과 한 달 반 전 41%였다. 만약 확진자가 쏟아지던 당시 총선이 치러졌다면 ‘전쟁 중에는 장수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표심과 ‘경종을 울리자’는 표심이 팽팽히 맞섰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정책은 달라진 게 없는데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뀌며 순위가 올라간 셈이다.

게다가 여당은 아무리 저조한 성적을 내도 “그럼 박근혜가 더 낫다는 거냐”는 한마디면 금방 만회할 수 있는, 전임자복(福)·야당복을 누렸다. 게다가 미래통합당은 환골탈태와 쇄신을 이끌 새 인물이 안 보인다. 만약 설상가상으로 공천 탈락 후 무소속으로 당선된 구시대 중진들이 다시 얼굴을 내민다면 통합당은 다시는 중도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실 문 정권 압승의 1등 공신인 ‘민간과 전문가의 창의에 맡겨둔다’는 접근법은 문재인 정권 3년간의 국정운영 특질과 정반대다. 시장·민간 부문 불신자들로 가득한 문 정권은 지난 3년간 경제 산업 외교 교육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전문가와 시장을 윽박지르며 직접 컨트롤하려 했고 그 결과 대부분 과목이 낙제점을 면치 못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장 ‘비(非)문재인적인 접근법’을 택한 코로나 대응에서 좋은 점수를 낸 것인데 문제는 앞으로다.

다음 대선이 후년 3월 9일이므로 내년 초부터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친문집단은 자기들이 누릴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보고 이른바 ‘촛불 과제’ 완수를 독촉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이들이 총선 압승 공신이라고 착각해 호응하면 쇠락의 길이다.

일각에선 이번 총선 결과를 보수의 몰락, 진보의 대세화라고 해석하지만 틀렸다. 보수는 중도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은 것이다. 중도는 이번에 대거 진보 손을 들어줬을 뿐 좌파가 된 것은 아니다. 산토끼가 집토끼가 된 것이 아니다.

중도층이 여당의 손을 들어준 것은 정권의 코로나 대응 자화자찬에 현혹되거나 열광해서가 아니다. 다만 다른 선장 후보 진영이 워낙 형편없고 미증유의 태풍의 끝이 보이지 않으므로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위선과 특권의 대명사 격인 인사를 끝까지 옹호하고, 권력 핵심부의 비위를 파헤치려는 검찰총장을 벼랑으로 몰고, 평생 경제현장을 접해본 적조차 없는 좌파 이론가들이 만들어낸 경제 정책을 밀어붙여 실물 경제를 파탄으로 내몬 그런 행태가 국민의 추인을 받은 것으로 착각한다면, 총선 승리가 ‘친문 어젠다’를 밀어붙이라는 민의라고 착각해 마이웨이 액셀을 밟는다면, 훗날 총선 압승이 보약이 아니라 독이 됐다는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총선#코로나19#민간#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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