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독에 ‘좌냐 우냐’ 묻는 사회… 편가르기부터 해서야”[파워 인터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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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화 ‘영웅’으로 새 도전 윤제균 감독의 영화와 사회

19일 강원 평창군 횡계리 인근에서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뮤지컬 영화 ‘영웅’을 촬영하고 있는 윤제균 감독. ‘해운대’ ‘국제시장’으로 ‘쌍천만 감독’에 오른 그는 “안 의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가는 이번 영화는 꼭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라며 “세 번째 천만 관객 영화에 대한 흥행 욕심보다는 의미와 작품성을 제대로 담고 싶다”고 말했다. 평창=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9일 강원 평창군 횡계리 인근에서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뮤지컬 영화 ‘영웅’을 촬영하고 있는 윤제균 감독. ‘해운대’ ‘국제시장’으로 ‘쌍천만 감독’에 오른 그는 “안 의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가는 이번 영화는 꼭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라며 “세 번째 천만 관객 영화에 대한 흥행 욕심보다는 의미와 작품성을 제대로 담고 싶다”고 말했다. 평창=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영화 ‘해운대’ ‘국제시장’으로 ‘쌍천만 감독’에 오른 윤제균 감독(50)이 6년 만에 영화 촬영현장에 복귀했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담은 뮤지컬 영화 ‘영웅’이다. 내년 개봉 예정인 이 영화는 2009년 초연 이후 1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동명의 뮤지컬이 원작이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 영화계에서 본격 뮤지컬 영화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러시아, 일본 등 해외 로케이션을 거쳐 강원 평창군 횡계리 인근에서 촬영 중인 윤 감독을 만났다. 》

○ 이 시대의 영웅은 평범한 사람

“2012년 제가 운영하는 영화사 JK필름에서 ‘댄싱퀸’을 촬영할 때 배우 정성화 씨가 출연하던 뮤지컬 ‘영웅’을 보러 갔었어요. 큰 울림이 있어서 언젠가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국내에서는 생소한 뮤지컬 영화라서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해서 원작 뮤지컬을 영화 스크린에 맞게끔 창작을 했습니다.”

‘해운대’ ‘국제시장’ 등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재난과 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가족이라는 창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 윤 감독의 장기는 이 영화에서도 발휘된다. 안 의사는 정성화 씨, 안 의사의 어머니이자 정신적 지주인 조마리아 역은 나문희 씨가 맡았다.

―현대사의 역사적 인물을 다룰 때 고민은….

“영화적 상상력으로만 만든다면, 그 힘든 시기를 실제 지내오신 분들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거짓이 될 수 있다. 반면 고증에만 충실히 한다면 영화적 메리트가 없다. 현대사를 가족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보면 좀 더 가까운 내 이야기로 느낄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족에 대한 희생의 의미는 특별하다. 외국인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6·25전쟁과 산업화 시대를 헤쳐 나온 아버지와 가족 이야기를 그린 영화 ‘국제시장’은 이념 논란도 낳았는데….

“‘국제시장’이 개봉했을 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당신은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겪어온 현대사가 워낙 엄혹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내 편, 네 편에 대해 너무 민감한 것 같다. 건강한 비평보다는 편 가르기가 먼저다. 이 작품이 독일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초청됐을 때는 달랐다. 외국인들은 이 작품을 이데올로기가 아닌 영화 자체로 감상을 하더라. 현지 관객들로부터 분단의 아픔과 유머가 섞인 휴먼드라마, 한국의 현대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웅’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젊은 세대는 산업화 시대의 용광로와 같았던 성장기에 살았던 아버지 세대에 비해 기회도 적고 상대적 박탈감이 심하다. 그래서 사회 곳곳에 세대 간, 계층 간, 좌우 간 갈등이 벌어진다. 이 시대 필요한 영웅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다. 정치인은 정치를 잘해야 하고, 언론은 언론 본연의 비판을 잘해야 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 각자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영웅이고 애국자다.”

○ “일장기말소사건 영화화 계획”

―올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지만, 영화배급시장에서 디즈니에 1위를 빼앗기기도 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영화의 현주소는….

“한국 영화시장의 해외배급사 또는 대기업에 의한 독과점 문제는 늘 지적돼 온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생충’의 쾌거를 봤을 때 한국 영화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 세계에서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자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절반 가까이 되는 나라는 한국 외에는 찾기 어렵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창의성을 잃지 않는 감독들이 있어 희망이 있다.”

―우리 영화가 한 단계 발전하려면….

“한국영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천만 ‘대박 영화’보다는 30억∼40억 원의 제작비로 관객 300만∼400만 명이 드는 ‘중박 영화’가 꾸준히 나와야 한다. 블록버스터 작품은 소수의 검증된 감독이나 배우, 스태프를 쓸 수밖에 없다. 안전하게 가야 하기 때문에 도전할 수가 없다.”

현대사 인물에 관심이 많은 윤 감독은 JK필름에서 ‘손기정 영화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던 사연도 들려줬다. “시나리오 자료를 준비하면서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소사건’에 대해 조사하게 됐다. 1936년 8월 10일자 동아일보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결승전이 열리던 당시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 사옥 앞에 조선 군중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군중들은 동아일보 편집국이 틀어놓은 라디오 생중계를 통해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메달 소식을 듣고 새벽 한 시까지 만세를 연창했다고 한다. 영화로 만들 때 이 장면을 꼭 재현해보고 싶다. 동아일보 100년 중에서도 일장기말소사건은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 “가장 큰 라이벌은 신인감독”

윤 감독은 당초 광고회사를 다니다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한 달간 무급휴직을 해야 했다. 당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영화 ‘낭만자객’(2003년)으로 쓰디 쓴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는 2014년 ‘국제시장’을 촬영할 때 영화계에서 처음으로 전 스태프를 위한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했다.

“저도 영화계 현장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24시간 촬영, 2∼3주 연속 촬영 등 비인간적 대우가 너무 많았다. 당시 만들었던 표준계약서 내용은 3가지로 심플했다. △1주일에 한 번은 쉬자 △하루 12시간 이상은 찍지 말자. 그 이상 찍게 되면 추가수당을 주자 △촬영하다 다칠 수 있으니 4대 보험은 들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표준계약서를 쓰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물어보니까 인건비 추가수당으로 한 3억∼4억 원 비용이 더 들어간다고 했다. 투자사와 의기투합해서 바꿨다. 그랬더니 촬영현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촬영 끝나고 저녁시간에 운동하고, 1주일에 하루는 쉬고, 밤 12시가 넘으면 초과수당을 두 배로 주니까 욕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예산은 좀 늘었지만, 촬영장 분위기가 좋아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됐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제작할 때 지켜온 원칙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TV나 영화, 인터넷에는 무겁고, 잔인하고, 공포 가득한 콘텐츠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 것을 잘 만들 자신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장르도 아니다. 초기에는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같은 상업영화를 만들었는데,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보니 작품 선택의 기준이 신중해졌다.”

윤 감독의 스마트폰 메모장에는 깨알 메모들이 제목과 함께 분류돼 있다.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본 코믹한 사연, 사업 아이템, 신문에서 읽은 좋은 글귀 등 그때그때 떠오른 아이디어를 기록한 메모장이다.

―국내외에서 라이벌로 생각하는 감독이 있다면….

“가장 큰 라이벌은 ‘신인감독’이다. 아침마다 샤워하고, 밤에 세수할 때마다 생각한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인감독들 보면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과연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는 동료들은 다 친구다.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봤기 때문에 라이벌 의식보다는 동병상련을 느낀다. 그런데 정말 잘 찍는 신인감독들을 보면 겁난다. 영화는 한두 편 잘되면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도태되지 않으려면, 평소에 늘 준비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갈고닦는 수밖에 없다.”

―내년은 총선의 해다. 좌우, 세대 간 갈등이 우려가 되는데….

“‘내 안에 그놈’이라는 영화가 있다. 왕따를 당하던 뚱뚱한 고등학생과 엘리트 유부남 사장이 몸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렸다. 영화 속 인물은 처지가 바뀌면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나도 촬영할 때 감독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투자자의 입장, 스태프의 입장에서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방향을 찾게 된다. 정치하시는 분들도 국민 입장에서 역지사지하고, 여와 야, 노와 사가 서로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좀 유연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평창=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윤제균 감독#영웅#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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