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강당. 미국 연방대법관 9명 중 가장 진보적인, 그래서 일부에겐 ‘악명이 높은’ 여성 인권의 대모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강연에 참석한 적이 있다. 첫 한국 방문이어서 강당이 가득 찰 만큼 관심이 높았다. 한 청중이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라고 물었다.
“스웨덴에서 살 때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사법제도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여성에게 주어진 동등한 기회라는 면에서 스웨덴이 미국보다 상당히 앞서 있었다. 스톡홀름 신문에는 ‘왜 여성은 두 개의 일을 가져야 하고, 남자는 하나의 일만 가져야 하나’라는 논평이 실렸다. 1960년대에 맞벌이 가정이 안정화되고 있었던 거다. 논평을 쓴 기자는 ‘왜 오후 7시만 되면 아내는 남편 밥을 차려야 하느냐’, ‘남편들은 쓰레기를 버리는 자잘한 집안일보다 자녀 육아에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 시절인 1970년대에 ‘생물학적 성(sex)’을 대체하는 ‘사회적인 성’ 젠더(gender)의 개념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를 바꾼 곳이 미국이 아니라 스웨덴이었던 것이다. 그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이 잊히기 전인 2016년 10월 미국에서 연수를 할 때 하버드대 앞 서점에서 ‘나 자신의 말들(My Own Words)’이라는 신간을 산 적이 있다. 긴즈버그가 직접 서문을 쓰고, 지인인 교수 2명이 그의 말과 글을 묶은 자서전 격이었다. 이 책에서도 스웨덴은 인상 깊게 등장한다.
왜 스웨덴이었을까. 긴즈버그가 하버드 로스쿨에 다닐 때는 재학생 500명 중 여학생은 9명뿐이었다. 건물 두 곳 중 한 곳만 여성 화장실이 있었는데, 없는 건물에서 시험을 보면 화장실에 못 갔다. 그때 딸이 태어났다. 육아 도우미가 집에 있는 오후 4시까지 로스쿨에 다녔고, 그 뒤에는 딸을 돌봤다. 딸이 잠들고서야 법전을 다시 펼칠 수 있었다. 졸업 때 로펌 14곳에 입사원서를 냈지만 “여성은 뽑지 않는다”며 거절당했다. 그 직후인 1962년 스웨덴 룬드에서 민사소송을 연구할 기회가 생겼다. 1933년생인 그는 20대 후반 길잡이(v¨agm¨arken)라는 스웨덴 말을 처음 접했고, 그 뒤 자신의 분야에서 길잡이가 됐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스웨덴을 다시 떠올린 건 평창 겨울올림픽 때문이다. 결승전에서 한국 여자 대표팀을 꺾은 스웨덴 컬링팀의 이력을 찾아봤다. ‘스킵’ 안나 하셀보리는 부모, 삼촌, 오빠, 사촌이 모두 컬링 선수다. 일곱 살 때 입문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링크에 자주 갔고, 그걸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 간혹 4대(代)가 팀이 된다는, 그래서 가족 스포츠라는 컬링의 본질에 매우 가깝고, 오랜 시스템 축적의 결과다. 신화를 쓴 우리 대표팀과는 큰 차이가 있다.
스포츠뿐이 아니다. “한국과 스웨덴은 너무 다르다”고 말하는 정치인도 자주 만났다. 그러나 스웨덴은 분명 영감을 주는 분야가 많은 ‘북극성 같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불평등과 차별, 복지, 핵발전소, 미국 의존 외교 등 우리 사회가 지금 풀어야 할 난제들을 해결한 선례도 있다. 낮은 봉급을 받으면서도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밤낮없이 일하는 정치인이 한국에 없는 건 다르다고 할까. 스포츠 격언 중에 “승리에서는 작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패배로부터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스웨덴의 가치를 벤치마킹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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