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미국에서 찾아온 지인과 추탕에 막걸리로 10일 저녁을 했다. 북한이 노동당 창건 기념일을 맞아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사거리 1만 km 이상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을 하는지에 온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하루를 무사히 마감하던 참이었다. 북한 문제를 오래 추적해 온 그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했을 때에야 바로 그날이 황 전 비서의 기일임을 기억해 냈다.
생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65주년 당 창건 기념일 열병식 주석단에 아들 김정은을 데리고 나와 처음 국제사회에 선보였던 2010년 10월 10일 오전, 황 전 비서는 북한 민주화라는 일생의 꿈을 못다 푼 채 안가의 욕탕 속에 앉아 조용히 숨을 거뒀다. 막걸리를 더 시켜 고인의 7주기를 기리는 몇 순배를 더 했다. 취재원에 대한 무관심을 마음으로 사죄하면서.
‘주체사상의 대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기자의 기억 속 그는 선생 그 자체였다. 2009년 7월 21일 첫 독대를 한 이후 사망 딱 열흘 전인 10월 1일까지 꼭 열 차례 단독 인터뷰를 하는 동안 황 전 비서는 김일성종합대 총장 출신답게 북한에 대해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애썼다. 만날 때마다 “기자랍시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우”라는 조언을 잊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좋아했고 어휘가 구수했다. 1945년 강원도 삼척에서 강제징용 도중 광복을 맞은 이야기를 하다 “파리가 둥둥 떠다니는 시큼한 막걸리를 한 사발씩 먹기도 했어”라면서 실제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그의 철학을 연구했던 후학들은 “말이 논리 정연해 그냥 받아 적으면 책이 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8월 망명한 태영호 전 공사도 딱 비슷한 스타일이다. 본보와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 다양한 매체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 역시 달변에 논리적인 말솜씨가 인상적이었다. 한 지인은 “체질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인물”이라며 “그냥 놔두면 두세 시간은 거침없이 이야기를 한다”고 전했다.
그런 그가 요즘 말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언론에 등장하지 않는다. 비공개 모임에는 가끔 나타나지만 언론과의 인터뷰나 출연 등은 모두 고사하고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지면에 등장한 것도 3월 30일자 출판기념회 공개 발언이 마지막이다.
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올 초 그가 대외활동을 그만둔 것은 북한의 위협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5월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여기저기서 황 전 비서의 길을 따라 걷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 2월 망명한 황 전 비서는 그해 대선에서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후 10년 동안 사실상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다. 북한과의 대화가 중요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그가 언론에 등장해 북한을 자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태 전 공사가 소속된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측은 “100% 본인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주변인들은 “때가 때이니 알아서 조용히 하는 게 좋겠다”는 충고가 여기저기서 오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본인 마음은 오죽 답답할까 이해가 간다. 김정은의 핵폭주로 온 국제사회가 대북제재에 동참한 상황에 얼마나 훈수를 두고 싶은 말이 많을까. 북한과 외교관계를 끊은 스페인과 말레이시아 등에서 쫓겨나 평양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후배 외교관들에게 “그리 가지 말고 서울로 오라”고 얼마나 말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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