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35>가로등이 하얀 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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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이 하얀 밤
―허충순(1945∼ )

가로등이 하얀 밤
가로등 밑에 얼굴을 쥐고 있는 사내가있다
담배는 꺼진 채 손에 들려 있다

그 손에 선인장이 자라고 있는 것 같다

거친 삶의 한켠
잠잠해진 그는 눈을 아래로 깔고 있다

모든 걸 잃진 않았다고
얼굴을 쥔 손바닥을 가만히 떼어주고싶다


사회파 다큐 사진 한 컷 같은 1연이다. 그 사내는 어쩌면 술에 취해 있을지도 모른다. 저런 모습으로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으련만, 무릎을 꺾고 주저앉아 담배 한 대를 빼들 수밖에 없었나 보다. 담배에 불은 붙였을까, 하얀 조명을 받고 있는 무대 같은 가로등 밑에서 사내는 얼굴을 감싸 쥔다. 멀리 가까이 도시의 하얀 소음이 끊이지 않고 밀려왔다 밀려가고. 사막에 홀로 떨어진 듯 외로운 사내의 손에 들린 담배 한 개비, ‘그 손에 선인장이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모르는 이의 불행한 모습을 돌발적으로 마주치면 심란해하며 얼른 지나쳐버리기 쉽다. 마음이 각박해서도 그렇고, 그 불행을 감당할 힘이 없어서도 그렇다. 그런데 화자는 ‘모든 걸 잃진 않았다고/얼굴을 쥔 손바닥을 가만히 떼어주고’ 싶단다. 거친 삶이 겨운 듯 길바닥에서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사내를 지켜보는 화자의 같이 울고 싶은 마음이 꾸밈없이 전해진다. 삶의 혼곤한 바닥에 대한 공감에서 우러나는 연민의 정이다.

허충순 시집 ‘화문(花紋)’에서 옮겼다. ‘화문’은 주옥같은 시편이 모여 있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로 빚어낸 은은히 깊은 시들이 독자에게 그윽한 감흥을 선사한다. 그중 아무렇게나 두 편을 더 골라 소개한다. ‘마냥 찰랑거리는 줄 알지만/파도는 날마다/바다 밑까지 내려갔다 올라온다’(시 ‘눈물’) ‘발목까지 물이 차는 해변을 걷는다//이제/오해로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이제/오해로 갈 수 있는 사람도 없으리라//나이 칠십은/오고가는 사람이 보이고//잔정 주듯이/ 발목까지 물이 차는 해변을 걷는다’(시 ‘오해’)

위 연배 시인의 새로운 시세계에 삼가 고개가 숙여지고, 분발 의욕이 솟구친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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