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만이 러시아를 보전한다고 믿었던 차르 알렉산드르 3세(1845∼1894)가 말했던, 러시아 정치인에겐 익숙한 금언이다. 러시아의 친구가 이젠 우크라이나, 특히 크림자치공화국의 정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럽연합(EU)과의 협력협정 체결 중단 이후 3개월간의 시위, 대통령 축출,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우크라이나 사태에선 국제질서의 냉혹한 현실과 한계가 드러난다. 특이한 대목은 러시아가 제시한 개입의 근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러시아 정부는 국익과 우크라이나 거주 러시아어 사용자들(the Russian-speaking populations)을 보호할 권리를 갖는다”고 말했다. 러시아어 사용자라니. 국제법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현실적인 문제(a moot question)를 꺼낸 셈이다. 우크라이나어나 타타르어 사용자, ‘보호’를 원하지 않는 러시아어 사용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혼란에 빠진 우크라이나 과도정부가 이런 개입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 축출 다음 날인 지난달 23일 ‘러시아어 제2공용어 활용법’을 폐지하는 악수(惡手)를 뒀다. 그렇다고 해도 체코의 독일인 보호라는 명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인 히틀러의 주장만도 못한 러시아어 사용자 보호 명목이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까.
크림자치공화국의 수도 심페로폴 정부청사와 의사당, 크림 국제공항을 점거한 ‘무장괴한’도 눈길을 끄는 존재다. 점령지마다 러시아 국기를 올린 이들(러시아군)을 푸틴은 자경단이라고 부르며 러시아군의 개입을 부인했다. 국제법상 침략 행위로 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눈가림이다.
이런 러시아의 움직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군사전략의 핵심인 부동항(不凍港) 세바스토폴 항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를 서방에 뺏길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국제사회와의 마찰을 무릅쓰고 타르투스 항을 지키기 위해 시리아의 손을 들어준 것처럼 말이다.
러시아 특유의 안보불안 정서도 읽힌다. 대소(對蘇) 봉쇄정책 입안자였던 조지 케넌은 ‘케넌 다이어리’에서 “여러모로 자신감이 결여된 소련인은 자신들의 위신을 존중받는 형식으로 안심하고 싶어한다”고 러시아인의 특성을 설명했다. 이런 불안감은 냉전시대엔 위성국가 건설로 이어졌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東進)과 유럽의 영향력 확대, 민주주의 전파…. 푸틴이 현재 느끼는 위기감은 쿠바 사태에서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던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시리아 정부의 화학무기 사용은 ‘금지선(Red Line)을 넘는 것’이라고 엄포를 놨던 오바마 대통령이 시리아나 우크라이나에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우크라이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줄 나라가 없다는 것을 푸틴은 분명하게 알았을 것이다.
이런 냉혹한 국제질서의 현실은 한반도라고 예외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군사대국 중국,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 일본, 사활적 이익 앞에선 ‘무서운 친구’를 동원하는 러시아, 힘이 빠졌지만 여전히 슈퍼파워인 미국 등 만만치 않은 이웃과 부대껴야 한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우크라이나 사태는 통일 대박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정세판단을 통해 강대국의 사활적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 국가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교과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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