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문’

  • 동아일보

‘문’
이근배(1940∼)

내가 문을 잠그는 버릇은
문을 잠그며
빗장이 헐겁다고 생각하는 버릇은
한밤중 누가 문을 두드리고
문짝이 떨어져서
쏟아져 들어온 전지(電池) 불빛에
눈을 못 뜨던 버릇은
머리맡에 펼쳐진 공책에
검은 발자국이 찍히고
낯선 사람들이 돌아간 뒤
겨울 문풍지처럼 떨며
새우잠을 자던 버릇은
자다가도 문득문득 잠이 깨던 버릇은
내가 자라서도
죽을 때까지도 영영 버릴 수 없는
문을 못 믿는 이 버릇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54년)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54년)
한참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파란 하늘에 둥실 뭉게구름이 떠 있고, 그 아래 어둠으로 둘러싸인 저택 앞에 불 밝힌 가로등 하나. 거인처럼 우뚝 솟은 나무, 인적 없는 거리, 집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어우러진 그림은 고즈넉함과 불안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최근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출장 갔다 그곳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벨기에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1954년 작 ‘빛의 제국’과 만났다. 그는 세상을 뜰 때까지 20년간 ‘빛의 제국’ 연작을 그렸는데 빛과 어둠, 낮과 밤, 꿈과 현실이 동전의 양면처럼 동거하는 낯선 풍경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모순된 요소를 창조적으로 뭉뚱그리는 전복적(顚覆的) 상상력에 철학적 사고를 융합한 천재성이 엿보인다.

이 작품을 모티브로 소설을 쓴 국내 작가도 여럿 있다. 단편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년’을 발표한 소설가 김연수도 그중 하나다. 2000년 본보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림 속 지상의 순간은 분명히 밤인데도 하늘의 시간은 낮인 것이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두 영역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 세계가 새롭게 재편하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이어 그는 ‘그동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느낀다면, 다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가 함께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맺었다.

이근배 시인의 ‘문’은 그 다름을 소화하지 못해 벌어졌던 섬뜩하고 오싹한 상황을 복기한다. 숱한 질곡의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6·25가 배경이다. 시인은 독립운동을 했던 남로당원 아버지를 열 살 때 처음 보고 1년 남짓 같이 살다 전쟁이 나면서 헤어졌다 한다. 군홧발로 문을 차고 들어온 사람들이 전짓불을 들이대고 집안을 뒤졌던 그때, 삶이 불안했던 그 세월이 ‘문을 못 믿는 버릇’으로 압축된 것이다.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 ‘전짓불 앞의 방백’에도 경찰인지 공비인지 정체 모를 사람들이 밀어닥쳐 손전등을 비추며 어느 편인지 다그치던 시대적 체험이 스며 있다.

한밤중 저벅저벅 다가온 발소리와 눈을 찌르는 전짓불이 남긴 상흔은 과거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로 쳐들어와 미래를 잠식할 태세다. 온갖 잣대로 편 가르기를 강요하고 다름을 기준 삼아 불이익을 주고 비난을 퍼붓는 사회에서 자기 보호를 위한 몸 사리기와 검열은 날로 깊어진다. 아직도 내 존재를 위협하는 문에 떨고 있는 우리는 더 교묘하고 서슬 퍼런 전짓불의 추궁이 기다리는 사회를 만들었다. 무자비한 질문이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너는 누구 편이냐?’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문#이근배#빛의 제국#르네 마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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