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 첫 삽 뜨고 경부고속도로 뚫리다

  • Array
  • 입력 2013년 5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23>1970년이라는 해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에서 버튼을 누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이 김학렬 부총리, 왼쪽이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다. 동아일보DB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에서 버튼을 누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이 김학렬 부총리, 왼쪽이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다. 동아일보DB
오적 필화사건은 1970년 민주화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부정부패를 고발한 ‘오적’은 이미 그때부터 조짐을 보인 압축성장의 그늘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4월 와우아파트 붕괴에 이어 12월 여객선 남영호가 적정 화물량의 3배가 넘는 짐을 싣고 가다 침몰해 무려 326명이 물에 빠져 숨진 사건은 빨리빨리 속도전이 낳은 대형 인재였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10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1970년대를 연 70년은 한국 산업화의 양대 축이 만들어지는 역사적인 해이다.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받는 포항제철이 4월 1일 첫 삽을 떴고 7월 7일엔 역사적인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 대망의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한 해도 1970년이었다.

‘대통령의 경제학’을 쓴 이장규는 책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포철과 경부고속도로는 산업구조 면으로나 경제발전 단계 면에서나 가장 중요한 기초산업이요, 사회간접자본으로 한국경제의 제조업과 물류의 기본 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전문가들이 등을 돌렸고 여론에서도 줄기차게 반대하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박정희가 집념으로 초지일관해서 성공시켰다. 박정희는 말 그대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역사에서 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만약 두 사업이 당시의 반대에 굴복해서 무산됐다면 지금의 한국경제는 어떻게 됐을까.’

철강업은 전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개발도상국들이 ‘첫째가 독립, 두 번째가 항공로, 그 다음이 바로 제철공장 건설’이라고 말할 정도로 공통된 갈망이었다. 철강이야말로 공업화의 상징이며 정치적 독립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포철 착공식 후 닷새 뒤인 70년 4월 6일자 박창래 기자의 기사를 통해 ‘10년 곡절, 난산의 이력, 포항종합제철 기공까지’라는 제목으로 지난 10년의 역사를 자세히 싣는다.

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에 제철소를 만들자는 계획은 이미 자유당 말기 이승만 정부 때이던 1958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상공부는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전담부서 ICA(국제협조처) 자금 3000만 달러와 국내 자본 150억 원을 들여 강원도 양양에 연산 20만 t 규모의 철강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하지만 4·19로 이 계획은 유산되고 이후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잇는다. 박 의장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면서 62년 5월 이정림 이양구 남궁연 설경동 등 유수의 재벌에게 명령(?)해 ‘종합제철민간투자공동체’를 구성한다. 외자 8000만 달러와 내자 30억 원으로 연산 32만 t의 공장을 짓고 미국 ‘부르녹스’사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조달과 합작조건이 맞지 않아 무산된다.

박정희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기술도 중요하지만 막대한 재원이 관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1966년 12월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5개국 7개사로 구성된 ‘대한종합제철차관단’(KISA)을 구성해 외자를 조달하기로 한다. 1억1000만 달러를 유치해 60만 t 규모의 공장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공장입지를 포항으로 정하고 KISA와 종합제철건설계약을 맺을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69년으로 접어들면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다들 한국경제가 제철사업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나선 것이다. 차관을 주기로 했던 미국과 서독 정부가 거절한 데 이어 세계은행까지 나서서 “한국에 종합제철을 세우는 것은 시기상조요, 경제성도 의심된다”고 한 것. 세계은행 유진 블랙 총재는 연차총회 석상에서 “개발도상국들의 고속도로 건설이나 종합제철사업 추진은 국가원수의 기념비 건립이나 다름없다”고 비아냥조로 말하기까지 했다.

결국 돈은 일본에서 나왔다. 장기영 박충훈에 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이 일본을 오가며 설득해 우여곡절 끝에 일본이 주기로 한 청구권 자금 중 일부를 농업용수 개발이나 다리 건설 등에 쓰기로 약속했던 명목을 바꿔 총 1억1948만 달러를 제철사업으로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포철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초기 자본금 140억 원은 정부와 대한중석이 3 대 1 비율로 했으며 정부는 공업단지를 조성하는 비용에서부터 공단 진입로, 철도, 항만, 공업용수 등 일체 사회간접자본을 모두 예산으로 대줬다. 또 시중은행이 빌려준 대출을 얼마 후 주식으로 전환해 이자부담을 탕감해줬으며 이자를 못 받게 된 주주인 은행들에 마땅히 줘야 할 배당금도 새 투자를 위해 1982년까지 한 푼도 주지 않도록 했다. 이장규의 말대로 ‘박정희는 포스코의 실질적인 창업자이자 CEO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곡절이 많았다. 야당은 “자가용족 부자들의 전용도로다. 혈세낭비”라고 비판했고 경제기획원조차 정부 총예산이 1500억 원인 상황에서 이 중 3분의 1이 드는 사업은 무리라고 비관적이었다. 건설부 내부에서조차 무리한 계획이라며 반대가 적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꼼수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정부 예산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에서조차 “전 부처 예산을 일괄적으로 5%씩 깎아서 고속도로 예산을 지원하라”고 밀어붙였다. 언론들이 ‘날치기 통과’라고 일제히 비난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속도로 공사는 현대건설을 비롯한 민간건설업체에 맡겼지만 현장 총괄 사무소장에 공병 출신 토목전문가 예비역 육군소장이 임명됐다. 마치 군사작전 같았다. 다시 이장규의 책을 인용한다.

‘포병 출신이라 독도법이 능한 박정희는 혼자 지도를 봐가면서 노선 결정을 비롯해 용지매입문제에까지 지휘봉을 잡았다. 심지어 시중은행장들을 비밀리에 소집해 수용할 용지의 시가감정을 보고받는가 하면 용지매입가격까지 지시했다. … 마침내 68년 2월 1일 착공에 들어간 경부고속도로는 70년 7월 7일 428km가 뚫린다. 누구도 이처럼 2년 5개월 만에 번개처럼 뚫릴 줄은 몰랐다.’

박 대통령은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가장 싼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예술작품”이라고 자랑했다. 국민들도 자신감에 들떴다. 70년 7월 7일자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산을 뚫고 강을 건너 들을 누비면서 아스팔트대로가 한국의 중추를 관통시켰다. 이 어려운 작업이 우리 기술진에 의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것은 불굴의 의지와 땀과 국민 부담이 오늘의 개통식을 가져온 원동력이었다. 벅찬 것을 안 느낄 수가 없다’고 했다.

빨리빨리 개통을 서두르느라 “고속도로가 누워있길 망정이지 아파트처럼 세워졌더라면 벌써 무너져 내렸을 것”이란 야당의 주장대로 하자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의 놀라운 집중력과 실행력은 당초 차관을 거절했던 개도국 지원기구인 IBRD가 마음을 바꿔 전주∼순천 간 호남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새말∼강릉 간 영동고속도로 건설에 적극적으로 차관을 제공하는 데 기여한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는 동안 노동자들의 고통도 깊어갔다. 마침내 뇌관이 폭발하니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지하#오적#경부고속도로#경제발전#철강업#포항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