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남자의 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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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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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사회부장
이기홍 사회부장
1980년대 중반에 해군사관학교를 다닌 한 지인에게서 들은 일화다.

한 4학년 생도가 퇴교 위기를 맞았다. 3학년 여름휴가 때 바닷가에서 아가씨를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눈 게 발단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 헤어졌는데 1년 뒤 이 여성이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하면서 해변에서 있었던 일을 고백한 것이다. 약혼남은 해사에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는 사관생도가 휴가를 나가 여성과 육체관계를 갖는 걸 금기시하던 시절이었다. 해사 훈육관은 생도를 불러 “네가 안 잤다고만 하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우수한 생도의 장래가 안타까워 덮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생도는 “잠을 잔 건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자퇴했다고 한다.

깨끗이 물러난 大人 김용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려운 선택 앞에 선 남자의 처신’에 대해 곰곰 생각해 봤다. 지난 2개월여간 공직후보자 인사검증 취재보도를 담당한 에디터로서 공직후보자들의 여러 유형의 반응을 봐 왔다.

최고위 자리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흠결이 드러나자 뻔뻔하게 부인하는 사람이 많았다. 개중 일부는 음모론을 제기하며 취재팀에 대한 험담을 퍼뜨리기도 했다. 사생활 신상털기를 한다느니, 동아일보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다느니 하는 저열한 수준의 역공세였다.

동아일보-채널A 인사검증 공동취재팀은 정치나 이념과는 무관한 사회부 기자들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건지…. 간혹 “새 정부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느냐”는 항의성 질문을 받으면 “문재인 후보가 승리했더라도 똑같은 강도의 검증취재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간단히 답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반면 깨끗이 잘못을 시인하는 후보자들도 있었다. 특히 김용준 총리후보의 선택은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에 대해 제기된 의혹과 문제점은 그 시절, 그 지위를 거쳐 온 법조인이라면 대부분이 자유롭지 못할 그런 내용들이었다. 그럼에도 새 정부에 누가 될까 봐, 그리고 평생 쌓아온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표연히 물러나는 모습에서 ‘대인(大人)’의 풍모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흠결을 안고 있던 일부 후보들은 끝내 버텼다. 김병관 국방장관 후보자도 머잖아 장관직 임명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 후보자로서는 억울한 대목이 많을 것이다. ‘역대 국방장관 후보자 가운데 가장 흠결이 많이 제기된 후보’라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같은 시절 군생활을 했던 지인들은 ‘당시의 잣대로 보면 평균보다 훨씬 높은 도덕성을 지킨 군인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시대적 변수를 감안한다 해도 그를 둘러싼 의혹과 흠결은 국방장관이라는 자리의 막중함에 비춰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다. 12일 느닷없이 국방부 브리핑룸을 찾아가 “헌신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한 것도 부적절했다.

그는 육사 수석 출신이다. 사관학교는 중간·기말고사 때 시험감독이 없다. 생도들 스스로 감시해서 커닝이 적발되면 생도들로 구성된 명예위원회에 넘긴다. 이렇게 군인은 명예를 먹고사는 직업이다.

명예에 살고, 죽는게 군인 아닌가

물론 과거에도 숱한 흠결이 드러난 후보자가 대통령의 신임이라는 동아줄만을 움켜쥐고 버틴 끝에 장관직에 입성한 경우가 적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추문을 잊어줬고, 장관이라는 막강한 현실 권력이 된 그들 앞에서 염량세태에 물든 세상은 고개를 숙였다. 결국 승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라면 우리 아이들에겐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는 건가. 손해 보는 선택은 하지 말라. 명예? 자존심? 그런 추상적인 건 다 헛되다.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건가. 김용준은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것인가.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장교의 꿈을 포기한 해사 생도는 어리석은 청년이었던 건가. 박근혜 대통령은 청소년들에게 ‘어떡하든 살아남으면 결국은 승자가 된다’는 정글의 가치관을 심어줄 것인가.

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김용준#대통령#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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