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을 해보자.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지금 살아 있다면 과연 아들을 위해 위장전입을 할까. 나는 맹모가 법 위반 여부로 망설이겠지만 아마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자식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고, 그를 위해선 무리한 부담과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게 부모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곧 새 정부 각료들의 인사청문회가 시작된다. 필경 누군가는 자녀 교육을 위한 위장전입 문제로 논란이 될 것이다. 그런 이들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국민에게 ‘법 준수’를 요구하는 공직자라면 설령 제도가 불합리하더라도 솔선수범해 따르는 게 옳다. 다만 교육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선 이젠 ‘위법행위’만 따질 게 아니라 ‘왜 위법이 발생했는지’를 살펴 위장전입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게 바람직할 것 같다.
굳이 맹모가 아니더라도 교육환경이 자식의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특히 한국에선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는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 유별난 의미를 지닌다. 이 나라 부모들이 자식이 좋은 대학만 갈 수 있다면 모든 희생을 감수하는 걸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어느 날 정부가 ‘고교 평준화(1974년)’란 이름으로 “이제부터는 사는 동네 학교만 가야 한다”고 정한 데서 비롯됐다. 명분은 좋았다. ‘비평준화로 인한 중학생들의 과도한 학습부담, 명문고교로 집중되는 입시경쟁의 과열을 막기 위해서.’ 하지만 실제론 학교 간 서열 차는 그대로였다. 말이 ‘평준화’지 입학방식을 제외한 나머지는 평준화가 불가능했다. 개별 학생의 능력과 교사의 질까지 평준화시킬 묘책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교별로 명문대 입학생 수의 차이가 났고, 이는 ‘특정 동네 고교에 가야 명문대를 갈 수 있다’는 등식을 성립시켰다. 강남 8학군이 생겨난 배경이다.
이렇게 되자 ‘좋은 학교 근처’에 살지 않는 학생이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부모가 잘살아서 아예 이사를 가든지, 아니면 위장전입 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방법도 간단했다. 아는 사람만 한 명 있으면 전입신고로 해결됐으니까. 적발되면 주민등록법 위반으로 3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했지만 걸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속도 그리 엄하지 않았고 설사 해도 집주인이 “살고 있다”고 한마디만 하면 더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대부분 친척, 형제, 친구 사이인 집주인이 사실대로 말할 리도 없었다.
그래도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최소한 자녀 교육으로 인한 위장전입은 ‘학군제’의 전제인 ‘평준화’가 실패한 데 따른 부작용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평준화를 옹호하는 주장이 적지 않지만 시도마다 학군 영향을 안 받거나 덜 받는 외국어고, 과학고가 생겼고, 없는 곳에선 이런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중요한 선거 공약이라는 점을 보면 평준화 제도의 실패는 명백하다. 아무리 밤새워 공부해도 주소 때문에 좋은 학교에 갈 수 없다면 눈 딱 감고 법을 어기는 일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 일이 내 아이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면. 물론 위장전입도 부모가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긴 하다. 서민이라면 그마저 못할 테니….
국가 제도는 사람의 인성을 시험하는 도구로 쓰여서는 안 된다. 자녀 교육 때문에 벌어진 위장전입을 문제 삼으려 한다면, 그에 앞서 왜 국가가 평준하지 않은 학교를 평준하다고 했는지 짚는 것이 먼저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장차 고위 공직자로서의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를 위장전입을 선택한 이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그놈의 대학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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