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현미]‘돈맛’에 길들여진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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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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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여성동아팀장
김현미 여성동아팀장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가 파산 신청을 했다. 정확히 말해서 기요사키 개인이 아니라 그가 소유한 여러 기업 중 하나인 리치글로벌이 파산한 것이다. 리치글로벌은 그동안 기요사키의 강연을 지원해온 러닝아넥스와의 소송에서 지자 2370만 달러(약 263억 원)의 배상금을 내지 않기 위해 파산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기요사키는 여전히 여러 기업을 소유하고 있으며, 개인자산이 8000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남의 돈 떼먹는 꼼수도 부자 되는 방법 중 하나인가. 이건 아니지 싶다.

로버트 기요사키는 누구인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속에 돈이 없으면 나라도 구제금융을 받고 개인은 실직과 해고로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돈은 곧 자유(Money is freedom)”라는 메시지를 심어준 사람이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핵심은 “가난한 아빠는 ‘돈을 좋아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부자 아빠는 ‘돈이 부족한 것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에 담겨 있다. 그 덕분에 그동안 돈, 돈 하는 것이 어쩐지 천박하다 싶어 꾹 눌러 참던 사람들은 더는 부자가 되고 싶은 열망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2000년 ‘부자 아빠’ 시리즈는 100만 부가 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이후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 부자가 된 것은 저자 자신뿐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2002년 새해 예쁜 여배우가 “여러분, 여러분…모두 부자 되세요. 꼭이요”라고 인사를 하는 한 카드회사 CF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복 많이 받으세요” 대신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했고 한 걸음 나아가 “돈 많이 버세요” “대박 터뜨리세요”와 같은 노골적인 인사도 등장했다. 2003년은 로또복권과 함께 ‘인생 역전’이 유행어가 됐다. 2002년 12월 처음 국내에 도입된 로또는 구매자가 번호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당첨자가 없으면 당첨금이 이월돼 무한대로 쌓인다는 점에서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인생 역전의 기대감을 부풀게 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 시작된 부자 열풍은 한국인의 경제관념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 잘해서 뭐 하니. 돈만 많이 벌면 돼”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세상이 된 것. 하지만 돈, 돈 하는 사이에 우리가 놓친 것은 없을까.

심리학자들이 ‘먹다’라는 단어에서 ‘수프’를 떠올리는 것처럼 연상 메커니즘에 의한 ‘점화효과(priming effect)’를 확인하기 위해, 피험자에게 돈과 관련된 네 개의 단어(high, a salary, desk, paying)를 제시하고 문장을 만들게 하는 실험을 했다. 그런데 ‘돈’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독특한 행동 패턴을 보였다.

일단 다른 주제어를 받은 피험자에 비해 문제 해결에 두 배 가까운 시간을 쓰며 열중했다. 또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누군가 옆에서 도움이 필요했을 때 훨씬 더 이기적인 태도를 취했다(도와주는 시늉만 한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돈에 대한 생각이 타인에 대한 배려를 줄이고 개인주의를 점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일 돈이 프린팅된 방석에 앉아, 돈을 넣은 행운의 액자를 바라보며,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를 주고받는 분들. 지난 12년 동안 행복했나요?

김현미 여성동아팀장 khmzip@donga.com
#로버트 기요사키#돈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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