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원 한 장 받은 적 없다”며 큰소리치던 사람들이 검찰청 문턱만 넘어갔다 하면 몇억 원씩 받았다고 다 털어놓고 구치소로 가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초 검은돈 추적의 귀재로 불린 어느 검사의 방은 ‘두 발로 들어가서 네 발로 나온다’고 했다. 혼쭐이 빠져 기어 나온다는 게 아니라 수사관이 겨드랑이를 끼고 나온다는, 즉 구속된다는 의미였다. 거악(巨惡)을 척결하는 검찰은 수사할 맛이 났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통쾌했다.
민완 검사는 ‘3보’ 감각이 뛰어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3보란 보안(保安), 보고(報告), 보도(報道)다. 범죄 정보 축적을 통한 증거 보강은 기본인 만큼 여기에 ‘보강(補强)’을 더한 ‘4보’가 검사의 필수요건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뇌물을 줬다는 사람의 진술서 한 장 받아놓고 보안에 실패해 언론에 보도되면 사건 관련자들이 온갖 수단과 인맥을 동원해 수사가 난관에 부닥친다고 한다. 내사(內査) 단계에서 너무 과장해 지휘부에 보고하면 수사 속도에 대한 부담이 커지고 정보가 새나가 관련자들이 입을 맞출 수 있다. 증거를 웬만큼 확보한 상태에서 검찰 안팎에 수사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을 때는 언론에 슬쩍 귀띔해 지원 사격을 유도한다.
최근 검찰 간부가 대통령 사저 터 매입 사건 수사 당시 대통령 일가에 배임(背任) 이익이 돌아가는 걸로 비치는 게 부담스러웠다고 기자들 앞에서 털어놨다. 부실 수사와 특검 도입의 정당성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검 중수부가 직접 칼잡이로 나서 대어(大魚)급임을 암시했던 민주당 공천헌금 의혹 사건은 한 ‘노빠’의 사기극으로 드러나고 있다. 노건평 씨의 측근 계좌에서 발견됐다며 호들갑을 떤 ‘수백억 원대 뭉칫돈’은 고철을 사고판 돈이었다. 증거 보강은 못하고 보안은 깨지고 보고체계는 뒤죽박죽에 보도가 앞서 나가니 ‘정치적 고려’ ‘표적수사’ 논란을 부르고 있다.
특수통(通) 검사로 오래 근무했던 한 변호사는 “노련한 검사는 자기 카드를 가급적 숨긴다. 별것 아닌 듯 연막을 치고 파헤치다가 이때다 싶은 순간 탁 터뜨려 상황을 반전시킨다”고 말했다. 기초 자료만 봐도 수사를 어디까지 확대해야 할지, 그에 따른 파장은 어느 정도일지 감을 잡는다. 반면 공명심(功名心)이 앞서고 굵직굵직한 수사를 많이 안 해본 검사는 사건이 좀 커 보인다 싶으면 흥분한 나머지 잔뜩 일을 벌였다가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기 십상이다.
인권이 강조되면서 검찰의 수사 여건이 팍팍해진 건 사실이다. 밤샘 수사는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고 아예 진술을 거부하는 피의자도 많다. 온종일 입을 다물고 있던 피의자가 느닷없이 “혈압이 높아 약을 먹어야 한다”며 약봉지를 꺼내 들면 정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목수가 연장 탓하는 건 구차하다. 유능한 검사라면 피의자가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다간 내가 다 덮어쓰겠다’고 판단할 만큼 꼼짝 못할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어야 한다.
인권 보호가 물렁한 수사의 구실이 될 순 없다. 검찰의 민주화가 연성화(軟性化)로 귀결돼선 안 된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밤샘 수사를 못한다고 피의자를 귀가시킨 뒤 검사도 덩달아 퇴근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집으로 돌아간 피의자는 다음 수사에 대비해 갖가지 묘안을 짜내고 있을 것 아닌가”라며 답답해했다. 큰 사건을 수사할 때는 밤새도록 검찰청사 곳곳을 뛰어다니느라 새벽녘이면 허리에 찬 만보계 숫자가 ‘10000’을 넘기곤 했다고 선배 검사들은 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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