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권재현]공자와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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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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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문화부 차장
권재현 문화부 차장
“왜 다들 공자로 돌아가는 거죠?”

8년 전 지금은 고인이 된 김충렬 고려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하며 물어 보았다. 중국사상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젊은 시절엔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다채로운 사상가에 심취하다가 말년엔 공자로 귀결하는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공자의 진면목은 나이가 들어야 알 수가 있기 때문이라오. 공자는 평생의 목표를 좋은 정치의 실현에 뒀고 장년에 이른 뒤에는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식견을 받아줄 주인을 직접 찾아다녔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요. 사람들이 꿈꾸는 부귀공명 어느 하나 이룬 게 없었건만 ‘만세의 사표’가 된 사내만큼 매력적인 인물이 또 어디 있겠소.”

최근 공자와 논어에 대한 책이 무수하게 쏟아지고 있다. 올해만 벌써 20권 넘게 출간됐다.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던 사회가 맞나 싶을 정도의 열풍이다.

도대체 왜? 공자를 그저 성인군자로만 아는 사람들은 공자의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한지 모른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만 극적인 것이 아니다. 공자는 칠십 평생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아무것도 이룬 게 없지만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은 돈키호테 같은 사내였다.

후대에 미화된 내용을 제거하고 그의 생애를 사실 그대로 추적한 연구결과를 보면 그는 하급무사의 서자 또는 무당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또 지천명의 나이를 넘겨 잠깐 등용됐을 때 가장 높이 오른 관직이 요즘으로 치면 4급 공무원쯤 되는 하대부에 불과했다.

그가 살던 춘추시대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왕족이나 공경대부에 해당하는 귀족이 아니면 정치의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미천한 출신으로 일국의 재상이 되겠다고 나섰다. 사람들은 당시 공자와 같은 사람이 많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상앙과 맹자, 소진, 장의 같은 이들은 공자가 개척한 길을 따라 걸어간 것에 불과하다.

공자는 후대의 유학자들이 덧칠한 것처럼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옹호한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독서를 통해 학문을 수양한 사람, 즉 군자(君子)라면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주장한 혁명가였다. 또 이를 실천하기 위해 중국 최초의 사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귀족 자제에게 가학(家學)으로만 전수되던 육예(六藝)를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가르쳤다. 배움에 있어서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은 유교무류(有敎無類)다.

당시 공경대부들에게 그런 그의 모습은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처럼 무모해 보였을 것이다. 상갓집개(喪家之狗)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14년을 떠돌던 공자에게 돌아온 것도 차가운 현실의 벽뿐이었다. 늙고 병든 몸으로 다시 낙향한 그는 5년 만에 씁쓸한 죽음을 맞았다. 이 역시 세상을 편력하다 귀향해 최후를 맞은 늙은 돈키호테를 연상시킨다.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주인공 돈키호테가 최후의 순간에 부르는 ‘이룰 수 없는 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싸움, 이길 수 없어도/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길은 험하고 험해도/정의를 위해 싸우리라/사랑을 믿고 따르리라/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 노래의 감동은 고스란히 공자에게 적용된다. 비현실적이라고 모두가 외면하더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 꿈. ‘이룰 수 없는 꿈’을 흥얼거리며 다시 ‘논어’를 펼치는 이유다.

권재현 문화부 차장 confetti@donga.com
#공자#돈키호테#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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