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과 시중 은행들은 최근 ‘잠재적 신용불량자’의 대출금리를 낮춰주고 원금은 오랜 기간에 걸쳐 나눠 갚게 하는 프리
워크아웃을 추진하기로 했다. 채무자의 상환 능력에 맞춰 부채구조를 개선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지 않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3월 말
현재 한국의 가계부채는 911조 원으로 1000조 원에 육박한다. 지난해 3분기 한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55%로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 등 재정위기에 처한 유럽 국가들보다 높다. 부채의 질도 나쁘다. 지난달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이 0.85%로 5년 7개월 만에 최고치다. 금융부채의 30%는 원금 상환이 시작되면 부실화할 가능성이 큰 ‘위험부채’로
분류된다.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화는 이듬해 글로벌 금융위기로 번졌다. 빚을
못 갚는 가계가 늘어나면 은행이 부실화하고, 정도가 심해지면 경제 전체에 위기가 온다. 이런 시나리오를 피한다고 해도 가계의
이자 부담은 소비를 위축시키고 성장잠재력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부동산과 직결된다. 가계부채의
43%가 집을 사느라 빚을 진 주택담보대출이다. 돈이 풀리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자 너도나도 집을 사느라 은행 빚을 졌다. 돈줄과
부동산을 죄면 쓰러지는 가계가 속출하고 부동산 매물이 쏟아지면서 ‘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가 올 수 있다. 반대의 경우 가계부채가
더 커진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부채 구조조정 이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이번 조치의 수혜자는 주로 저(低)신용층이다.
가계부채 문제는 제2금융권이나 대부업체를 이용하는 쪽에서 훨씬 심각하다. 비은행권 악성 채무자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하지만 부채 구조조정은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가져올 수 있다. 비상(非常)한 국면에나 쓸 수 있는 예외적인 조치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져선 안 된다. 엄격한 현장 심사를 거쳐 대상자를 선정하고, 프리 워크아웃 과정을 자력(自力)으로 졸업할 경우
걸맞은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정치권이다. 만에 하나 대선을 앞둔 여야가 이번 조치를 계기로 무분별한 빚 탕감
공약 경쟁을 벌인다면 정말 큰일이다. ‘버티면 빚을 안 갚아도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나라의 미래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