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 도로에 공사가 시작됐다. 보도블록을 걷어 내고 새것으로 교체하는 공사다.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던 블록인데 바꾸는 것을 보니 어느덧 연말이 가까워 온 모양이다. 보도블록 공사의 흉을 보려니 나 자신도 세금 낭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무뎌져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연말에 예년처럼 정부 예산의 결산을 준비해야 한다. 배정받은 예산을 남기면 복잡한 일이 생긴다.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모두 집행하는 것이 좋다. 그러니 연말이 되면 어떻게 하면 돈을 다 쓸까 연구를 한다. 서둘러 실험재료를 사고 장비를 산다. 물론 아까운 생각이 든다. 피 같은 세금을 이렇게 급하게 쓰는 것이 편치 않다. 그러나 이렇게 돈을 모두 써버려야 뒤끝이 깨끗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별다른 죄의식 없이 행하고 있다.
이런 비양심적인 세금 사용은 특정 부서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정부 예산을 사용하는 모든 공공기관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매우 합법적인 예산 집행이다. 단지 비효율이 문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공직자가 알고 있는 공공연한 ‘불편한 진실’이다. 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고, 매년 반복적으로 행해 관행이 된 일이다.
연말에 보도블록을 바꾸는 이유
왜 이러한 낭비적인 일이 반복되고 있는가. 정부의 결산제도 때문이다. 정부는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예산 집행을 마감하고 결산한다. 그리고 부서별로 사용 후에 남아 있는 돈을 모두 회수한다. 이와 같이 집행을 마감하고 남은 돈을 회수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남은 예산을 모아서 새해에 요긴한 곳에 사용하자는 취지다. 그러나 이것이 졸속 집행을 조장하는 주범이다.
회수한 돈을 재배정하여 보는 이익보다 몇십 배나 더 큰 손실이 생기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돈을 남겨 돌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연초에는 짜임새 있게 사용하려고 아껴두었던 돈을 연말이 되면 서둘러 집행한다. 이것은 합법적인 일이고 인간 본능에 가까운 행위이기 때문에 탓하기도 어렵다. 나도 처음에는 남은 연구비를 반환해 본 적이 있다. 세금을 절약했으니 칭찬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예산을 주었던 기관이 곤란하게 된다는 것이다. 상부기관에서 질책이 떨어진 것이다.
첫 번째 질책은 ‘왜, 처음에 예산을 과다 신청했느냐’는 것이다. 초기에 꼭 필요한 만큼만 신청했더라면 다른 곳에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란 논리다. 두 번째 반응은 더욱 난감했다. 예산 집행실적이 나쁘니 다음 해에 예산이 삭감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 대한 예산 집행자의 반응은 효율성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기한 내에 예산을 남김없이 집행해야 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이 정립된다. 그러다 보니 결국 연말에 서둘러 돈을 모두 없애버리는 일이 일상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반해 연말결산 후에도 잔액을 다음 해에 이용하게 이월해주는 돈에 대해서는 사용자의 태도가 180도 다르다. 기업에서 들어온 돈이 이런 경우다. 아껴서 사용하고 연말이 돼서도 서둘러 집행하는 일은 없다. 개인 돈 사용하듯이 절약한다. 경험으로 보면 집행 효율성에 약 20%는 차이가 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일은 대학 연구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거의 똑같은 말을 한다.
나는 정부 예산의 결산 방식을 고칠 것을 제안한다. 첫째 집행 잔액을 1년간 더 사용할 수 있게 이월하여 준다. 둘째는 잔액을 남긴 것을 추궁해 다음 해 예산을 삭감하지 않는다. 셋째 예산을 절약해 많이 남긴 부서를 포상한다. 이러한 제도적 변경이 있어야 세금 사용자의 자세가 바뀌고 연말 세금 낭비의 관행이 바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부의 예산 집행 효율은 적어도 10%는 올라갈 것이라 생각한다. 정부 예산 326조 원을 생각하면 연간 32조 원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국방비 33조 원에 비교되는 돈이다. 우선 당장은 남은 돈을 회수하지 못해 손실이라 할지 모르지만 몇 년만 지나면 예산 효율이 올라갈 것이다.
남는 예산 회수가 졸속집행 주범
정부 예산을 관장하는 기획재정부도 이 점을 고려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바꾸지 못하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산을 이월해 주면 부서별로 과다하게 예산을 확보해 이월시켜 가면서 사용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예산의 10% 내에서 1년 동안만 더 사용하게 해주면 이런 부작용도 줄어들 것이다. 모든 법적인 제도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고정관념에 빠져 스스로 구속하면 바꿀 수 없다. 예산결산 제도를 변경해 연말 세금 낭비를 중단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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