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방러 결과를 보면 러시아는 북한에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투명성이다. 김정일의 방문 일정과 협의 내용이 비교적 소상히 알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국제외교는 주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밀실협상이 국제평화를 깨뜨린다는 뼈저린 경험을 한 국제사회는 오늘날 공개외교를 국제규범으로 삼고 있다. 중국과 달리 러시아는 김정일의 방문에 대해 국제관행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둘째, 상호주의다. 러시아는 체제 전환 이후 타국과의 거래에서 시장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옛 소련 시절 동맹국에 우호가격이란 이름으로 거의 무상으로 경제 지원을 하던 태도에서 완전히 탈바꿈했다. 중국이 북한의 후견국으로서 선심외교를 하는 것과 달리 러시아는 실리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셋째, 세계 질서적 시각이다. 모스크바에서 평양을 바라보는 시선은 세계 안보 유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반면 베이징의 시선은 동북아 지역의 현상 유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러시아는 북한의 핵개발 중단에 대하여 중국보다는 더 적극적이며 국제규범을 강조한다.
북한의 경제 지원 요청에 대해 러시아는 한반도 가스관 연결사업을 대가로 요구했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대부분의 가스를 서(西)시베리아에서 생산하여 유럽으로 수출하였다. 유럽은 러시아 천연가스의 최대 수출지역이며 황금시장이다. 유럽 수출가격이 러시아 국내 공급가격의 4배에 달한다. 이제 러시아는 아시아에서 새로운 황금시장을 찾고 있다.
러시아 에너지 수출의 관건은 파이프라인의 건설에 있다. 거대한 유라시아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시베리아에서 생산되는 에너지는 소비시장까지 원거리 운송을 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세계 주요 산유국들이 인접 항만을 통해 해상수송을 하는 반면 러시아는 항만까지의 거리만 수천 km에 이른다. 따라서 러시아는 건설비용이 엄청나지만 한번 건설하면 수송비용이 저렴한 파이프라인으로 직수출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반세기 동안 유럽에 석유와 가스를 수출하면서 거대한 수송망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에는 수송 인프라의 부재로 에너지 수출이 부진하였다. 현재 러시아는 동(東)시베리아 석유 및 가스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아시아로 향한 파이프라인 건설을 병행하고 있다. 동시베리아에서 극동 연해주를 연결하는 5000km의 송유관 건설사업이 완공 직전에 있으며, 중국을 연결하는 중간 지선이 완공됨으로써 러시아의 중국에 대한 에너지 공급이 가능하게 됐다.
한국은 2015년부터 연간 소비량의 20%에 해당하는 750만 t의 천연가스를 도입하기로 합의했지만 러시아의 공급망은 현재 오프라인 상태다. 동시베리아에서 불과 3, 4일 만에 블라디보스토크 터미널에 도착한 천연가스가 액화가스로 변환돼 선박에 실려 남한에 도착하게 돼 있다. 따라서 러시아는 북한에 의해 단절된 가스관 연결로 한국시장이 러시아 공급망에 접속되길 원한다. 김정일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가스관 건설에 합의했고, 귀국길에 러시아 송유관의 중국 연결지점인 다칭(大慶)을 들렀다.
한반도 가스관 사업에 대해 우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우려는 북한이 가스관 중간밸브를 잠글 수 있다는 에너지 안보의 위험이다. 이 경우 북한은 통과수익의 포기는 물론이고 우크라이나 사태가 보여주었듯 러시아와의 충돌을 각오해야 한다. 가스관이 무용지물이 되는 최악의 경우 통일 후 사용을 위한 건설투자로 보아야 한다. 두 번째 우려는 북한이 얻게 될 막대한 통과수익이다. 북한은 파이프라인에서 통과 수수료만큼 가스를 뽑아 쓸 수 있는 권한을 가지기 때문에 핵 개발에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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