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씨의 소설 ‘도가니’는 장애인학교에서 일어난 구타와 성폭행 문제를 다뤘다. 학교 교육청 시청 경찰서가 진실을 은폐하고 기간제 교사가 시민단체와 함께 이를 고발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어떤 신문기사 한 줄 때문이었다”라고 밝혔다. 출판사도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작가가 현장을 취재하고 자료를 수집한 뒤 집필하였다”라고 소개했다.
미국은 재판의 전과정 공개하는데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어도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실화가 아니다. 작가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지만, 내용의 일부 아니면 상당 부분을 허구라고 봐야 한다. 소설가 장정일 씨는 ‘도가니’가 논픽션이었다면 사회적 파급력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어쩌면 그 영향으로 진실이 발본되고 미비한 법들이 고쳐질 확률도 높았으나,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는 온갖 사회적 의제와 다양한 글감을 문학이란 대롱으로 탈수해 버린다.”
가정해 보자, ‘도가니’를 논픽션으로 만든다고. 소설을 쓸 때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이 아닌 대화와 묘사를 넣으면 안 되니까.
다시 가정해 보자, 이 사건이 미국의 일이라고. 미국 작가나 기자는 진상에 접근하기가 한국보다 쉬울 것이다. 검찰과 변호인의 공방, 피고인과 증인의 진술, 판사의 발언과 조치 등 재판의 모든 과정을 공판기록으로 만들고 공개하니까.
인디애나대의 토머스 프렌치 교수는 세인트피터즈버그타임스 기자이던 1997년, 세 모녀의 피살 사례를 ‘천사와 악마(Angels & Demons)’라는 기사로 썼다. 범죄는 1989년 6월 플로리다에서 발생했고, 재판은 5년이 지나 시작됐다. 그는 5만4000단어 분량(홈페이지에서 출력하니 A4 용지로 226쪽)의 기사로 퓰리처상(피처 부문, 1998년)을 받았다.
뉴욕타임스의 커트 아이헨월드 기자는 엔론이라는 대기업에서 벌어진 비리의 전모를 746쪽의 논픽션(Conspiracy of Fools)에 담았다. “책 내용은 모두 사실”이라고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두 기자 모두 수천 쪽의 공판기록을 활용했다.
한국은 어떤가. 공판기록은 고사하고 판결문조차 전부 공개하지 않는다. 제3자가 보려면 사건번호를 알아내서 법원에 신청해야 한다.
필자는 지난해 MBC PD수첩의 항소심 공판이 궁금해서 여섯 번의 휴가를 냈다. 내용을 받아 적으려고 서울중앙지법 서관 421호 법정에서 매번 5∼7시간을 앉아 있었다. 미국 기자라면 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였다.
다행히 국내에서도 모든 판결문을 인터넷에 공개하기로 했다. 국회가 지난달 말, 이런 내용의 민형사소송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당의 박영선 의원이 대표 발의한 ‘사법정보 등 공개에 관한 특례법안’의 일부를 반영한 결과다.
한국은 판결문 공개도 ‘반쪽’ 그쳐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앞으로 확정되는 판결만 공개한다. 개정안이 시행되기 전의 재판은 제외된다. 또 공판기록은 포함되지 않는다.
공판기록을 공개하면 합리적인 절차와 판단을 거쳐 판결이 나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지켜보는 눈이 더 생기는 셈이니 전관예우라는 나쁜 관행에 제동을 걸고, 위증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법조계는 개인정보 유출을 걱정한다. 하지만 이름과 주소를 흐리는 작업은 어렵지 않다. 조금 귀찮을 뿐이다. ㅱ글 파일을 예로 들자. 편집→찾아 바꾸기 기능을 이용하면 문서에 나오는 같은 이름을 동그라미로 바꾸는 데 1, 2초로 충분하다. 한국의 정보기술(IT)이라면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헌법 제109조). 관련 기록도 당연히 공개해야 하지 않을까. 알권리를 신장시키고 사법제도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국회 학계 언론이 사법부와 같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