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포옹과 포용없는 ‘民心의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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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6일 20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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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요즘 중년 주부들 사이의 화제가 ‘냉면집 이혼 사건’이다. 1970년대 말 ‘소녀와 가로등’을 불렀던 가수 진미령이 열흘 전 방송 토크쇼에 나와 개그맨 전유성과 결별한 결정적 계기를 털어놨다.

1993년 결혼식을 올린 뒤 ‘유성아 뭐 먹고 싶니’라는 요리책을 낸 걸 보면 그에겐 엄마 같은 면도 있던 것 같다. 그런 진미령이 하루는 단골집 냉면이 먹고 싶어 전유성과 만나자고 했다. 냉면집에 도착해 보니 전유성은 혼자 냉면을 다 먹은 후였다. 그래도 기다려주겠대서 냉면을 시켰다. 그런데 막 먹으려는 순간 전유성이 “난 다 먹었고 보는 건 지루하니 먼저 가겠다”며 자리를 뜨더라는 것이다.

부조리연극 한 토막 같지만 아내들은 단박에 모든 걸 이해했다. 토크쇼 진행자인 김수미가 “똑똑하고 착하며 순수한 전유성의 특이한 인생관이 진미령의 생각과 안 맞았을 뿐”이라고 위로한 말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언뜻 들으면 옳은 소리만 하는 사람’의 그 합리적 효율적 판단이 듣는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할 때가 적지 않다. 특히나 절실하고도 중요한 순간에 배신당하는 심정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문제는 상처받은 이의 심정을 상대적 강자인 그들은 잘 모른다는 점이다. 뒤늦게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며 그 문제가 중요하지 않음을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해봤자 소용없다. 사람이 가장 원하는 건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을 함께 느껴주고, 인정해 달라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말로 감정이입 또는 공감(empathy)이라고 번역되는 이 능력이 모자란 남편에 대해 아내들은 무시당했다고 속상해하고, 화병을 앓다가 더러는 ‘황혼 이혼’으로 끝맺기도 한다.

“인정해 달라”는 약자들의 분노

‘냉면집 이혼 사건’은 진미령 개인이나 사소한 가정사로만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사회 갈등의 밑바닥에도 “나를 인정해 달라”는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가 부글거린다.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인정에 대한 욕구’가 물질적인 욕구와 또 다른 생물학적 근원을 가졌다고 최근 저서 ‘정치적 질서의 기원’에서 강조했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마찬가지이고,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정치다. 하지만 강자들은 상대적 약자에게도 그들과 똑같은 욕구가 있다는 걸 모른다. 가진 자들에게 현격히 부족한 것이 공감능력이라는 게 심리학자들의 지적이다.

사람대우 받지 못해 분노한 사람에게 이성과 논리로 효율과 실용만 강조해선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경제를 챙기는 것도 최고경영자(CEO)에게나 걸맞지 대통령으로선 존경받기 힘들다. 국민이 부여한 권위를 통해 반대파를 설득하고, 때로는 어르고 겁주고 달래가며 사회갈등을 풀고 컨센서스를 이루는 것이 대통령의 역할이고 정치의 핵심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이를 사회통합위원회 또는 형님에게 맡겨 놓고 일벌처럼 일하면서, 자신에게 일이 중요하다고 국민에게도 일만 권했다.

“경제성장의 온기가 아직 골고루 퍼지지 않아 마음이 무겁다”며 대통령이 서민정책을 수차 강조했어도 공감하기 어렵다. 환율과 금리로 수출 위주 대기업에 혜택을 몰아줘 서민들에게 돌아갈 성장의 열매를 덜어낸 건 이 정부였다. 소비자물가지수와 실업률을 합한 우리 국민의 고통지수(Misery Index)가 10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도 ‘반값 등록금’처럼, 어려운 환경에도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진짜 서민에게 돌아갈 재원을 갉아먹는 포퓰리즘 정책이나 내놓고 있으니 민심이 나아질 리 없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글로벌 환경은 크게 변화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평화와 번영은 함께 가는 것인 줄 알았다. 꼭 그렇지는 않다는 뒤바뀐 현실이 중국에서, 미국과 유럽에서 펼쳐지고 있다.

강자부터 ‘생각의 조정’ 필요하다

환경이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고 제도도 달라져야 하는데, 아쉬울 것도 눈치 볼 것도 없는 기득권층은 우리나라나 남의 나라나 있는 자리에서 더 해먹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보통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 귀족들이 프랑스혁명을 자초했듯, 독재자와 군부 엘리트층이 ‘아랍의 혁명’을 불러온 역사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민주주의가 있는 나라에선 선거로 폭력 없는 혁명이 가능하다는 게 다행스러울 정도다.

우리가 지키는 법과 제도를 가진 자들도 그대로 따르고 있고, 따라서 실력과 노력으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을 때 그 사회의 시스템이 유지된다고 한다. 이 믿음이 깨진 탓에 민심은 여당이 불안에 떨 만큼 ‘이혼’을 고민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강조한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경쟁만이 아니었다. 도덕성은 사람과 사람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다고 강조한 또 다른 저서 ‘도덕적 감정의 이론’도 중요하다. “인정한다”며 강자가 먼저 손 내미는 포옹과 포용이 지금이야말로 필요한 때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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