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20개월 이상 남아 있는데 경제정책은 벌써부터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감세(減稅) 철회가 여당에서 제기되는가 하면, 우리은행 등의 민영화는 부처 간 갈등을 빚고 있으며 영리의료법인 등 서비스 선진화는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출범 당시 내세웠던 MB노믹스의 주요 근간이 모두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최근 금융당국의 도덕적 해이와 복지부동은 더욱 가관이다. 저축은행을 둘러싼 부도덕은 두말할 나위 없고, 론스타의 적격성 판정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2003년에 외환은행을 인수한 론스타를 놓고 금융위원회가 아직도 대주주 자격 유무를 판가름하지 않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직무유기가 어디 또 있겠는가. 어떤 변명을 늘어놓는다 해도 금융계의 막대한 피해와 대외 이미지의 실추는 보상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더욱 서글픈 현실은 누가 아무리 정론을 펴 정부를 독려한다 해도 그런 미제(未濟)들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부처 이기주의와 이해관계의 대립이 오랫동안 누적되어 왔을 뿐 아니라 그런 갈등을 조정하는 리더십을 더는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체념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작은 것 하나, 과세 표준이라도 선진화하자고 제언하려 한다.
과세 표준구간 현실맞게 정비해야
소득세와 법인세 감세는 MB 경제정책의 핵심이었고 실제로 최고 과표(課標)를 제외한 모든 구간은 감세가 이뤄졌다. 다만 8800만 원을 넘는 고소득자와 2억 원이 넘는 법인은 내년부터 2%포인트의 감세를 적용하여 각각 33%와 20%를 부과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 정치권에서 이 조치를 철회하자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감세 논란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감세의 경기 부양 효과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부자감세’ 논란이다. 감세는 대체로 소비와 투자를 증대시켜 경기를 부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미국은 감세정책으로 경기가 회복된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된다. 물론 일본처럼 장기불황으로 감세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감세는 여전히 경기부양과 고용창출, 나아가 세수증대도 가져올 수 있는 정책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부자감세 논란은 부자의 기준과 누진세율의 정도에 따라 정답이 크게 달라진다. 과연 연소득 8800만 원의 부자 기준은 적절하며 35%의 최고세율이 합당한가. 물론 절대적인 정답은 없다. 현행 최고세율은 영국이나 일본 등의 40% 수준보다는 낮지만 미국(35%)이나 스웨덴(25%), 싱가포르(20%)보다는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부자의 기준을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답이 좀 더 명확해질 수 있다. 미국은 4억 원이 넘고, 일본과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중국도 2억 원을 넘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는 우리보다 낮은 부자 기준을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부자감세 논란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형평을 중시하는 국민정서와 동질성이 강한 문화적 특성이 주된 이유겠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과표의 기준과 구간이 경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고소득 기준 8800만 원은 1996년 설정된 8000만 원에서 10% 인상된 것이다. 그동안 국민소득은 얼마나 성장했는가. 1996년의 1007만 원에서 무려 2.4배 상승하였다. 그렇다면 8800만 원의 부자 기준은 합당한 것인가. 2억 원 이상에 최고세율을 부과하는 법인세는 더욱 한심하다. 기업규모가 얼마나 급격하게 신장하고 있는가.
이 제도의 최대 수혜자는 당연히 조세당국이다. 임금과 과표 구간이 동시에 올라가면 세수만 급증하지 않겠는가. 과표는 고정된 채 명목임금만 상승하면 많은 소득자가 점차 높은 세율 구간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 결과 종합소득세는 상위 14%가 전체의 93%를 부담하고 40%의 근로소득자는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다. 지나치게 왜곡된 누진세율 때문에 세금 부과에 따른 불평등 해소 효과가 미국이나 영국 등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있다.
물가 연동하면 감세논란도 사라져
이런 모순을 시정하려면 과세표준을 물가상승률에 연동시키고 구간도 재정비해야 한다. 부자의 기준도 성장의 속도에 따라 변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미국 등 많은 선진국이 과표를 인플레이션에 연동해 매년 조정하고 있다. 과표가 물가에 연동되면 모든 개인이나 법인이 실질소득에 합당하게 세금을 부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반복되는 부자감세 논란은 물론이고 세금 정쟁(政爭)도 상당 부분 차단할 수 있다.
부자에게 누진세를 적용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선 부자의 기준부터 제대로 표준화해야 조세의 공평성이 확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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