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과목 이기주의

  • 동아일보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해 8월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개편 예시안을 발표하면서 선택과목 수를 축소해 학생 부담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어제 확정된 개편방안은 딴판이다. 사회탐구 영역 11개 과목이 10개로 1개 줄어드는 데 그쳤고 과학탐구는 8개 그대로였다. 해당 과목 교사들의 거센 반발 때문이다. 교사들은 지식의 융합과 통합이 세계적 추세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도 수능 과목을 줄이려고 하면 “다른 과목은 몰라도 내 과목만은 안 된다”고 버틴다.

▷과거에는 지리 한 과목으로도 배울 건 다 배웠는데 이 글로벌시대에 한국지리, 세계지리, 경제지리가 따로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번 개편방안에서는 경제지리만 빠졌다. 역사 분야에서는 한국근현대사 세계사 국사 등 3개영역 가운데 한국근현대사가 빠지는 대신 동아시아사가 들어갔다. 윤리 과목은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등 2과목으로 오히려 늘었다. 명목상 과목 선택권을 주었지만 학교는 이렇게 세분화한 과목을 모두 개설할 수 없다. 학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교사가 있는 과목을 선택해야 한다.

▷201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자 71만1313명 가운데 제2외국어·한문영역 응시자는 12만824명(18%)이었다. 이 중 45.7%인 4만9000여 명이 아랍어를 선택했다. 외국어고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어떤 학교에서도 아랍어를 가르치지 않지만 아랍어 과목에 응시하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 수험생이 몰리고 있다. 반면 전담 교사가 넘쳐나는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선택한 학생은 수천 명에 불과하다. 시험 성격이 이렇게 왜곡돼 있으면 제2외국어·한문영역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을 텐데 교과부는 존치시켰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제7차 교육과정 수정안을 만들 당시 김신일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교육과정 개편은 권력투쟁”이라고 말했다. 교육과정 개편 과정에서 해당 과목 교사와 대학교수는 물론 국회의원까지 가담해 살벌한 로비전을 벌이는 걸 빗댄 표현이었다. 교육과정도 시대 흐름을 반영해야 한다. 이번 개편에서 청소년에게 어떤 지식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학생들이 언제까지 과목 이기주의의 포로가 돼야 하는지 답답하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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