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송의영]외환보유액 많다고 좋은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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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1997년 300억 달러 남짓하던 외환보유액은 이제 9배가 넘게 불어나 28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외환보유액이 증가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곳간에 쌓아놓은 쌀가마니가 늘어난 양 흡족해하는 분이 많다. 하지만 곱씹어 볼 일이다. 파종에 쓰지도 않고 이자 붙여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은 채 곳간에 쌀을 잔뜩 쌓아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한국뿐 아니라 많은 신흥국이 외환보유액 쌓기 놀이에 몰입하고 있다. 이 놀이를 즐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환율의 하락을 막기 위해서다. 달러가 밀려들어오면 환율이 하락 압력을 받는다. 수출채산성이 떨어졌다고 기업들이 아우성을 치고 이에 동조하는 언론과 정치권이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 외환당국이 환율주권을 외치며 환율 하락을 저지하기 위해 달러를 사들인다.

고금리 대출로 저금리 예금하기

두 번째 이유는 외환위기 방지다. 달러의 갑작스러운 유입은 단기 외화차입을 통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밀물처럼 들어온 달러는 한국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거나 세계 금융시장이 뒤숭숭해지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이때 환율이 폭등하는 외환위기가 발생하거나 심하면 달러를 차입한 은행이 지급불능 상태에 빠지는 외채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정부는 이때 달러를 시장에 풀고 문제 기관에 달러를 대출해주기 위해 비상용 달러를 비축해 둔다. 현명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추천하고 세계의 석학들이 세계 금융시장의 근본적 불안을 해소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코미디 같은 일이다.

상구는 4%의 금리를 지급하기로 하고 은행에서 100억 원의 대출을 받는다. 그런데 그 대출금을 1%의 금리를 지급하는 요구불 예금에다 고스란히 모셔둔다. 매년 대출금의 3%인 3억 원을 은행에 헌납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고 물어보니 은행이 언제 대출금을 갚으라고 할지 몰라 불안해서 그런다고 한다. 그럼 ‘당신 참 신중한 사람이군요’ 하고 칭찬해주고 싶은가, 아니면 ‘그럼 애초에 대출을 받지 않았으면 되잖아 바보야’라고 충고해주고 싶은가.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만 하더라도 중앙은행이 석 달 치 수입액의 외환을 보유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나 1997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갑작스러운 단기외채 회수에 녹아내리는 것을 목격한 뒤로 신흥국들은 앞을 다투어 보유 외환을 불려나갔다. 2000년대에 들어와 새로 성립된 세계 금융시장의 규범은 석 달 치 수입액으로는 어림도 없고 최소한 단기외채만큼의 외환보유액은 유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강화되었다. 단기외채의 대부분은 민간이 시장금리를 주고 외국으로부터 차입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중앙은행이 운용하는 외환보유액의 대부분은 비상 시 신속한 회수를 위해 선진국의 국공채와 같은 안전한 저금리 상품에 투자된다. 높은 금리로 외채를 들여오고 이것이 언제 회수될지 몰라 거의 전부를 외국의 저금리 국공채에 투자하고 있다면 이것이 상구의 대출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외환보유액 비용 수혜자가 내야

한국은 새로운 규범을 초과 준수하면서 단기외채를 훌쩍 넘는 2800억 달러의 보유 외환을 자랑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환율로 따져 국내총생산의 30%를 초과하는 수치다. 정보가 부족해 믿을 만한 계산은 할 수 없지만 상구의 경우와 유사하게 3%의 금리 손실을 가정한다면 우리나라는 매년 국내총생산의 1%인 10조 원 정도를 선진국에 헌납하고 있는 셈이다. 보험료로서 그리 비싸지 않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익을 초과하는 비용이며, 10년이 쌓이면 22조 원이 든다는 4대강 사업을 다섯 번 반복할 수 있는 액수다.

정부는 다각도로 이 비용을 축소하려 노력하고 있다. 투자공사를 만들어 외환보유액의 운용수익률을 제고하고, 외국 중앙은행에 마이너스통장을 개설하여 외환보유액을 높게 유지할 필요성을 줄이려 하고 있다. 그리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는 IMF가 신흥국들에 대형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 주는 제도를 제안할 계획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이 어리석은 게임이 될지 모른다. 외환보유액과 다른 안전장치가 증가하면 한국은 더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것이고 이는 더 많은 외채를 불러들일 수 있다. 보를 높이면 더 많은 강물이 고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단기외채 보유의 비용을 증가시켜 단기외채 자체를 감소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외환보유액의 유지 비용은 국민이 아니라 수혜자로부터 걷는 것이 옳다. 필자가 금융기관의 단기외채 보유에 세금을 부과하자고 주장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송의영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교수·경제학 eysong@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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