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4·19 민주혁명을 다시 생각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17일 03시 00분


4·19혁명 50주년을 맞으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서양에서 이식(移植)되거나 정부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1960년 4·19혁명의 불길은 51일 전인 2월 28일 대구 시내 고등학생들이 점화했다. 일요일인데도 학생들이 야당의 선거유세를 들으러 가지 못하도록 학교당국이 등교를 지시하자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항거했다. 정·부통령을 뽑는 3·15선거일 집권 자유당 정권의 조직적인 부정행위가 드러나면서 경남 마산에서 대규모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 도중에 최루탄을 눈에 맞아 사망한 당시 17세의 고교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는 소식이 4월 11일 전해졌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다음 날부터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25일엔 대학 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동숭동에서 종로까지 행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하야(下野)를 발표했다. 학생들이 불 지핀 의거(義擧)에 국민과 교수들이 동참함으로써 부정선거로 장기집권을 꾀하던 독재정권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망자 186명, 부상자 6026명이 나왔다.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이요, ‘피의 혁명’이었다.

어제 한국정치학회와 4월회 주최로 열린 ‘4·19혁명 5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유세희 전 4월회 회장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은 4·19혁명에서 시작됐다”며 한국인이 민주주의를 할 능력과 의지가 있음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확연히 높아지고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렸다는 점에서 4·19혁명은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최초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4·19혁명에는 동아일보도 동력(動力)을 제공했다. 2월 28일 대구 고교생 시위를 집중 보도했고, 선거부정의 사전 공작이 이뤄지고 있음을 파헤쳤다.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자 가장 먼저 억울한 죽음을 전국에 알렸다. 이달 7일 열린 관훈클럽 주최 ‘4·19혁명과 언론’ 세미나에서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은 “동아일보 특종보도를 통해 신문에 처음 등장한 뒤 다른 신문들도 다투어 경찰의 부정선거 지령 기사를 보도했다”고 말했다.

4·19혁명은 5·16군사정변으로 단명(短命)의 미완 혁명이 되고 말았지만 그 정신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계승됐고 우리 국민은 1987년 마침내 민주화를 이룩했다. 1987년 이후 5차례 평화적이고 공정한 선거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 것은 대한민국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렸음을 뜻한다.

그러나 ‘국민’의 이름을 팔며 민주주의 절차와 제도를 짓밟는 행태가 곳곳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전문에 새겼다. 그럼에도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 법치주의 무시,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남용되는 포퓰리즘 등은 민주주의에 대한 자해(自害)가 아닐 수 없다.

단시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달성한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4·19혁명의 정신을 오늘에 살리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해 대한민국 건국의 험난한 과업을 이뤄낸 주역들과 산업화세력에 대한 평가에도 인색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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