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50년]“죽게되면? 도피할까?… 아니다, 들끓는 민심에 불 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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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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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그자리에 다시 선 시위주도 강우정-김유진-김면중 씨

4·19혁명을 촉발한 고려대 4·18시위의 주역들이 12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를 찾아 4·18기념탑 앞에서 당시의 치열했던 순간을 회상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유진 ‘4월혁명 고대’ 사무총장(경제학과 59학번), 강우정 한국성서대 총장(법대 57학번), 김면중 씨(철학과 57학번). 변영욱 기자
4·19혁명을 촉발한 고려대 4·18시위의 주역들이 12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를 찾아 4·18기념탑 앞에서 당시의 치열했던 순간을 회상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유진 ‘4월혁명 고대’ 사무총장(경제학과 59학번), 강우정 한국성서대 총장(법대 57학번), 김면중 씨(철학과 57학번). 변영욱 기자
《“오늘 이런 글을 남겨 놓는다는 것, 이것이 유리할 것은 없을 게다. 하지만 어떤 다른 수단으로 이 글이 이용된다 해도 결국 할 수 없는 일일 게다. 남자로서 최초의 결심을 표명한 이상 실행단계에서 후퇴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중략) 정권의 교체가 언뜻 생각 키운다(생각이 난다). 설마 하여간 그런 것까지는 생각할 필요는 없다. 들끓고 있는 마음에 불을 질러놓자는 것. 이것이 나의 임무다. 죽음에 대한 해결, 사(死)에 대한 정확한 판단. 준비가 완료되었는가? (중략) 만일 이 일로 인해서 불행히 죽는다면…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혹 도피할까? 적어도 지도자의 입장에 선 자가 타자의 위험을 방관 후 도피한다는 것. 인간이 아니다. 정치적인 수완과 그 막후사정에 둔한 내가 이제 이 일에 뛰어든다. 이용당하는 것은 죽어도 싫다.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일 것. 오늘 삼인의 모임이 절대 주동자이기만 바란다. 나의 둔한 눈이 막후의 그 어떤 손을 못 보았을까 걱정이다. 자! 이제 내 마음은 완전히 결정되었다. 우물쭈물 겁쟁이 우정이가 되지 말자. 부모님께 끝까지 불행한 자식이 됨을 미안히 생각하며 마치 유서 같아서 기분이 상한다. 11시 18분.”(강우정의 일기 중에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의기투합… 신입생 환영회날에 기습시위
부상 치료중에 입대… 당시 유진오 총장이 훈련소에 선처 편지

○ “정치세력에 이용당할까 봐 두려웠다”

1960년 4월 11일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마산 3·15의거에 참가했던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마산 시민들은 곧 2차 의거에 나섰다. 서울에서 답해야 했다. 누군가는 정치권력 심장부의 코앞에서 항거의 불을 댕겨야 했다. ‘민족 고려대’ 법대 4학년으로 단과대 학생위원장이던 청년 강우정(70·한국성서대 총장)은 책임감에 몸을 떨었다.

강 총장이 1960년 4월 14일 4·18 고려대 시위를 앞두고 만년필로 쓴 이 일기는 거대한 역사의 격랑을 마주한 청년의 불안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강 총장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2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본관을 찾아 기자에게 당시의 일기를 공개했다. 강 총장은 “죽음을 각오하고 물러서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쓴 일기”라고 말했다.

일기를 통해 4·18 고려대 시위의 순수성도 엿볼 수 있다. 강 총장은 “야당 등의 정치세력에 이용당할까 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고려대 4·18 시위는 법대 강우정, 상대 이기택, 문리대 윤용섭, 농과대 김낙준, 정경대 이세기 등 단과대 학생위원장들이 미리 결의했다. 강 총장은 “모든 고려대 학생들이 의기 투합해 자연스럽게 시위에 나선 것”이라며 “설립자 이용익 선생의 건학이념과 이를 이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민족대학에 대한 열망이 우리에게 전해져 혁명의 방아쇠가 됐다”고 말했다.

○ 50년 만에 고려대 시위 현장 답사

“선배님, 우리 여기 함께 다시 섰네요.”

12일 고려대 본관 앞에서 김유진 ‘4월 혁명고대’ 사무총장(69)이 감격에 차 말했다. 당시 경제학과 2학년으로 시위에 앞장섰던 김 사무총장은 “신입생 환영회였던 18일 낮 12시 50분에 인촌 선생 동상 앞으로 모이는 것이 작전이었다”며 “스크럼을 짜고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까지 내달렸다”고 회상했다.

당시 철학과 4학년으로 시위에 참가한 김면중 씨(73)도 본관 앞에 섰다. 이들은 이날 고려대 정문, 신설동 로터리, 종로, 서울시의회, 청계천4가 등 4·18 고려대 시위의 현장을 함께 답사했다.

“여기가 천일백화점 자리예요. 학교로 돌아가는데 자유당 정권의 하수인이었던 깡패 70여 명이 갈고리와 몽둥이를 들고 이 근처 골목에서 쏟아져 나왔거든. 아수라장이었지. 지프차 지붕 위에서 ‘전진하라 고대야, 뒤로 밀리면 밟힌다’라고 외치다 굴러떨어졌어. 바로 난타당했지.”

김 씨는 이때 머리 등을 다쳐 9개월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김 씨는 “내가 치료를 마치지 못하고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자 유진오 당시 총장께서 손수 편지를 훈련소장에게 쓰셔서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셨더라고. 아름다운 시절이었지.”

“기자는 몇 살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4·19혁명을 3·1운동처럼 오래된 일로 생각하더라고….”

돌아가는 승용차 안에서 김 사무총장이 한탄조로 말했다. 강 총장의 선창으로 이들은 고려대의 옛 교가를 불렀다. 주먹 쥔 손을 흔드는 품이 여느 청년들보다 힘찼다.

“젊은 가슴 숨은 생명 힘 넘쳐 뛰노라/이 힘이여 이 생명을 펼 곳이 어디냐/눌린 자를 쳐들기에 굽은 것을 펴기에/쓰리로다 뿌리리라 이 힘과 이 생명/보성전문 우리 모교 보성전문!”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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