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시절 고위직을 지낸 민주당의 한 의원은 요즘 “하루하루 야당의원으로 지내는 것이 수치스럽고 모멸스럽다”는 말을 자주 한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민주당을 아예 무시해버리고, 주요 언론에서도 잊혀진 존재 취급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세종시 문제만 해도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의견 대립만 부각될 뿐 민주당은 당사자 축에 끼지도 못하고 있다.
민주당 핵심 당직자는 사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야속하다. 워낙 거세게 밀어붙이니까 상생(相生)의 룸이 별로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 야당은 확 싸우다가도 딱 멈추는 식으로 완급조절이 됐는데, 현 정권은 민주당을 상대조차 해주지 않고 있어 반대만 하는 야당의 모습밖에 보여줄 게 없다는 것이다. ‘쿠오바디스(어디로 가시나이까) 민주당’이라는 탄식이 민주당 안팎에서 들린다. 그러나 민주당이 존재감을 잃은 근본 원인이 실은 당 내부에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무엇보다 소수파인 친노(친노무현) 386 출신들이 정세균 대표를 에워싸고 당을 탈레반식 모험주의로 몰고 간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2008년 쇠고기 촛불시위 때도 제1야당으로서 국회를 지키지 않고 거리의 농성대열을 따라다니는 데 급급해 ‘정치적 해결사’ 역할을 스스로 내팽개쳤다. 지난해 미디어법 통과 뒤에도 1개월간 아스팔트로 뛰쳐나갔고, 10월 국정감사는 ‘소득 없는 부실 국감’이었다. 연말 예산정국 때는 4대강에 모든 것을 연계해 실질적 예산 감시·통제 기능을 못한 채 나라살림의 발목을 잡는다는 인식만 심어주었다.
최근에는 성희롱 전력이 있는 우근민 전 제주지사를 복당시켜 6·2 지방선거에 내세우려다 여론의 비판을 받고 부랴부랴 공천에서 배제했다. 한나라당이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리를 매섭게 공격할 수 있는 호재를 스스로 놓쳐버린 꼴이다.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정동일 서울 중구청장을 비롯해 ‘철새’ 소리를 듣는 인사들을 끌어들여 야당의 생명인 도덕성·개혁성 기반을 스스로 흔들었다.
민주당이 5개 야당+4개 시민단체의 공동정책과 연합공천에 매달리는 것도 민주당의 정체성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여권(與圈)은 중도실용주의 친(親)서민정책을 내세워 ‘중간층’을 파고드는데 중산층과 서민의 당이라는 민주당은 ‘왼쪽 30%’를 놓고 좌파 정당들과 선명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과의 1 대 1 구도가 아니라 N분의 1로 스스로를 토막 낸다면 수권정당이 되기 어렵다. 국가채무가 360조 원에 이르는데 재원대책도 없이 전면 무상급식 공약을 내놓고 ‘4대강 사업 안 하면 된다’고 강변해서는 대안야당이라 하기 어렵다.
민주당이 중심을 잃고 헤매는 동안 노무현 정부 5년의 국정실패로 ‘폐족(廢族)’이 됐던 친노 세력은 곳곳에서 민주당 공천을 꿰찼다. ‘노무현 정신의 부활’을 앞세운 국민참여당은 5월 23일 노 전 대통령 1주기를 계기로 ‘추노(追盧)투쟁’을 벌여 야권의 헤게모니를 쥐려 하고 있다.
정세균 대표는 지난해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집 ‘정치에너지’에서 “민주당은 현재의 어려움에서 교훈을 얻고 더 강하고 유능해져야 한다”고 썼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이 오만에 빠져 권력다툼으로 지샐 때 민주당은 과연 건강한 견제세력으로 국민이 미래를 맡길 근거지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제1야당 민주당은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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