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재정거품으로 금융거품 다스리기

  • 입력 2009년 9월 2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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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만 1년이 됐다. 그 사이에 금융 및 자산시장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일반상품 시장과는 달리 적어도 금융시장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에 바탕을 둔 ‘효율적 시장’ 이론이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 대신 “시장은 본래 불안정한 것으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케인스주의자들의 발언권이 커졌다.

합리적 이콘, 탐욕적 인간

경제주체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었다. 전통적인 경제학은 인간을 매우 합리적인 존재로 가정한다. 호모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다. 이에 대해 케인시언들은 실제의 인간은 탐욕 투기 근시안 충동 정보부족으로 비합리적 선택을 자주 한다고 지적한다. 요즘 잘 팔리는 책 ‘넛지’는 전자를 ‘이콘’, 후자를 ‘인간’이라고 줄여 불렀다. 미국 예일대의 로버트 실러 교수는 나아가 “이 같은 탐욕과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거품과 이번 금융위기를 만들어냈다”고 논증했다. 따라서 경제이론과 금융정책도 이콘이 아니라 탐욕적 인간을 전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야성적 충동’에서)

투기와 탐욕이 활개 치는 자산시장에서 거품의 생성과 소멸은 필연적이다. 시장상황이 좋을 때 위험은 과소평가되고 투자자들은 ‘도취적 기대’에 빠져 고위험 투자에 뛰어든다. 거품은 점점 부푼다. 특히 지난 20여 년 동안 위험평가가 쉽지 않은 파생상품이 확산되면서 금융시장이 갈수록 위태로워졌다. 이 시점에 거품을 꺼뜨리고 올바른 가격을 회복하게 만드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도대체 어디 갔을까. 역설적이지만 이 멋진 손이 힘을 못 쓸 때라야 금융시장은 초과수익에 환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시장원리를 아예 폐기할 필요는 없다. 비유를 들어보자. 때때로 폭풍우도 있지만 크게, 길게 보면 바다는 평평하다. 중력이라는 근원적인 힘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시장도 결국은 멋진 손에 이끌려 균형을 찾아간다. 그러나 당장 격랑이 치는데 “수면은 궁극적으로 평평하다”는 소리만 하고 있으면 죽는다. 선장은 최악의 악천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항해해야 한다. 배는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며, 정부 또한 이를 기준으로 조선 및 운항 규칙을 정비해야 한다.

한국경제는 세계적으로 침체에서 가장 빨리 회복되고 있다.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각국의 대응책이라는 것이 ‘금융거품’ 붕괴로 인한 쇼크를 ‘재정거품’으로 달래는, 그야말로 단기처방임을 잊으면 안 된다. 캠퍼주사의 효험이 좋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여기에만 기대면 정말 큰일 난다. 금융개혁이 빠진 재정거품의 주입은 금융업계의 도덕적 해이까지 초래해 더 큰 허리케인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보기에 딱한 정부-한국은행 갈등

금융개혁은 금융의 바다에 태풍에너지가 축적되지 않도록, 혹 질풍노도가 와도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골자는 시장이 탐욕에 휘둘리지 않도록 막는 금융건전성 규제의 강화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하고 있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은행법 개정 논란이 이는 것도 같은 흐름에서다. ‘중앙은행은 소비자물가의 안정과 함께 금융시장 안정에 핵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경제학계의 추세에 맞춰 한은은 그 설립 목적에 ‘금융안정’을 포함시켜야 하며 관련 정보 접근권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가 이에 반대하고 있어 해묵은 감정대립이 재연되고 있다. 금융위기 재발방지 방안을 놓고 정부와 중앙은행이 앙앙불락 다투는 나라는 세상에 한국뿐이다. 우리 당국자들 역시 합리적 이콘이 아니라 탐욕적 인간이어서인가. 안타깝고 딱하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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