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일요일밤 청계광장에서

  • 입력 2008년 10월 8일 19시 54분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미인을 뽑는 대회가 최고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미스코리아뿐 아니라 미스월드나 미스유니버시아드 선발대회는 가난한 나라 한국의 TV도 꼬박 중계를 해줬다. 그 시절 세계 미인 선발대회를 볼 때마다 부러웠던 것은 외국 미인들은 잘 웃고 웃음이 자연스럽다는 점이었다. 미스코리아들은 대부분 무표정이었고 어쩌다 웃어도 억지웃음이었다. 우리는 왜 자연스럽게 웃지 못할까 의문을 가졌다.

청중이 호응하는 축제에 부러움

비슷한 부러움이 또 있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초중반 TV로 외국 공연을 접하면서 청중이 공연자와 하나가 돼 노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무대 앞의 청중이 춤을 추면서 공연에 열광하는 광경이 당시 한국 사회에는 무척 이질적이었다. 스스럼없이 자기를 표현하고 즐기는 자유가 부러웠고 그것이 가능한 사회가 부러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져온 군부독재가 언제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 이제 막 1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질식할 것 같은 사회 분위기를 원망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곤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30여 년이 흐르면서 한국은 민주화됐고 어느 정도 부자 나라가 됐다. 사회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일에 파묻혀 사느라 변한 세태를 직접 현장에서 체험해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목격했다.

일요일인 5일 밤 동아일보 앞 청계광장에서는 하이서울페스티벌 가을축제 공연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귀청이 떨어져라 터져 나오는 록 음악에 청중이 열광했다. 빠른 비트 박자와 함께 열기가 전해졌다. 무엇보다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청중이었다. 양손을 들고 춤을 추고 환호하면서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길거리에서도 연인끼리 또는 삼삼오오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간혹 내 나이 또래 중년 부부들도 있었다.

문득 10대 시절 품었던 부러움이 떠올랐다. 이제 우리에게도 축제가 있고 길거리 공연이 있고 여기에 빠져 몸을 맡기는 청중이 있구나…. 감개무량했다. 50대 이상 세대가 10대였던 시절 부러워하면서 꿈꾸었던 미래가 눈앞에 있었다. 젊음을 발산하도록 제공된 공간이 있고 이를 마음껏 향유하는 청중이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와 있었다. 열광적으로 앙코르를 연호해 추가공연을 끌어내는 열기가 있었다. 언뜻 무질서해 보이는 이런 모습이야말로 과거 우리가 갖지 못했던 소프트파워일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 자체에 웃을 일이 거의 없었다. ‘조국 근대화’가 지상명제였고 오랜 독재의 영향으로 사회는 일종의 엄숙주의에 빠져 있었다. 50대 이상은 오로지 일만 했던 세대였다. 어쩌다 즐거운 일이 있어도 웃음을 아꼈다. 괜히 웃음이 많으면 실없는 사람이라고 눈초리를 받았다. 감정을 숨기며 살았기에 경제 사정이 편 뒤에도 이를 향유할줄 모르는 세대다.

의식구조 전환돼야 사회발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발전한 사회가 새로운 도약을 하려면 의식구조 전환이 수반돼야 한다. 소프트파워의 뒷받침이 없이는 더는 발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항상 이 점을 우려한다. 하지만 의식구조 전환은 벌써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성세대가 변한 의식을 따라잡지 못하고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의식구조 전환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다음 세대가 떠안아야 할 일이다. 전 세대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 터이다. 기성세대가 록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없다고 해서 요즘 세대의 춤추는 행위가 나쁜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음악에 열광하고 그런 음악을 만들어내는 세대, 이런 것이 미래 한국을 걸머질 창조력으로 연결될지 모를 일이다.

국제 금융위기로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고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들리지만 우리에게는 사람이 있다. 한국이 언제 자원으로 흥했는가. 사람이야말로 우리의 자산이다. 한국 파이팅!

김상영 편집국 부국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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