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위용]러시아의 무서운 자원외교 장벽

  • 입력 2008년 5월 23일 02시 55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4만여 명의 영국 관중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21일, 영국 석유회사 BP 직원들은 이삿짐을 챙기고 있었다.

이틀 전 이 회사 직원들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수사관들이 양국 합자 석유회사인 TNK-BP 모스크바 본부를 급습하는 것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직원들은 “양국 정부가 축구경기를 계기로 모처럼 화해를 모색하는 마당에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러시아 수사관들은 막무가내였다.

이 회사는 동시베리아에서 가스가 가장 많이 매장된 곳으로 알려진 코빅타 가스전 개발을 주도했지만 올해 3월 이미 사업자 지분을 러시아 국영기업인 가스프롬에 넘긴 상태다.

짐을 옮겨 싣던 한 직원은 “석유와 가스 값이 지난해의 두 배가 넘게 치솟으면서 외국 에너지 기업을 몰아내려는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고 말했다.

BP와 같은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러시아 자원 개발 현장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외교관들도 자원 보유국의 힘을 새삼스레 실감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금이 부족했던 러시아는 외국 기업을 끌어들여 지하자원을 채굴해 수출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석유와 광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자 이제는 자원개발을 목적으로 입국하는 외국 기업에 높은 진입 장벽을 쌓고 있다.

자원전문가인 발레리 미스체로프 씨는 “올해 자원보유국은 지난해의 절반만 생산해도 수익이 넘친다”며 “외국 기업의 투자는 자국의 이윤 극대화를 방해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자원외교에는 국가 간 동맹 관계도 통하지 않는다. 러시아와 끈끈한 혈맹 관계를 과시해 온 중국은 지난해 9월 동시베리아 송유관 공사를 중단하고 기술자 120여 명을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아제르바이잔과 카자흐스탄에서 일하는 한국 상사 직원들은 “유전개발에 뛰어드는 외국 기업이 일회성 투자 계획을 밝히면 지분 참여에서 아예 배제되고 만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한국에서 불거진 유전게이트와 같은 정략적 접근과 한건주의는 앞으로 발붙일 틈이 없다는 것이 이들 직원의 얘기였다.

‘자원외교’를 외치는 이명박 정부도 “일회성 투자나 자원개발 하나로 승부하지 말고, 다양한 분야의 교차 투자와 함께 위험 관리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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