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잘못했습니다”

  • 입력 2008년 4월 3일 03시 01분


어린아이들은 웬만한 잘못을 해도 크게 혼내지 않는다. 몰라서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가르치면 된다. 하지만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가진 성인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잘못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건국 60주년이면 나라의 나이로 쳐도 이제 어린 시절은 벗어났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대한민국 공직자 사회만은 아직도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알면서 잘못을 저지를 뿐 아니라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지시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고 하나를 말하면 하나만 한다. 자신에게 조금 불리하다 싶으면 꾀를 부리기도 한다.

웬만해선 꿈쩍 않는 공직자 사회

며칠 전 경기 고양시 일산경찰서장은 화가 나서 현장까지 달려간 이명박 대통령의 질책에 “잘못했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피해 어린이 부모가 아무리 호소해도, 인터넷에서 시민들이 공분을 터뜨려도 꿈쩍하지 않지만 대통령이 나서면 번개처럼 움직여 금세 범인을 잡아낸다. 선생님 눈치만 살피는 초등학생 같은 우리 공직자 사회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어디 일산경찰서뿐인가. 최근 한 달 사이에만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해양수산부가 해체되면서 공무원들이 몸만 떠나자 새로 이사 온 보건복지부는 해양부의 멀쩡한 사무집기를 밖으로 끌어내 부근 빈터에 열흘이나 쌓아놓았다. 언론의 지적이 없었다면 이 집기들은 그대로 폐기처분됐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이 대통령은 “전통적 관료주의 발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질책했다.

일부 부처가 정부조직 개편으로 줄어드는 인원을 유지하기 위해 편법으로 태스크포스(TF)를 만든 행태도 이에 못지않다. 정부조직을 줄이는 근본취지야 어떻게 되건 말건 일단 내 부처, 내 사람만 챙기자는 이기주의와 보신주의가 몸에 배어 있다. 이 대통령이 “그러니까 모피아라는 얘기를 듣는 것”이라고 기획재정부를 질타하자 각 부처는 부랴부랴 TF를 해체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다. 이 와중에 일부 부처가 꼭 필요한 TF까지 함께 없애버리는 것을 보면 자체적인 판단능력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TF가 모두 없어지고 진짜로 공무원 정원이 줄어들어도 빠져나갈 구멍은 또 있다. 산하기관에서 직원을 파견 받아 부려먹으면 된다. 국토해양부에만 토지공사 주택공사 등에서 101명이 파견 나와 일하고 있다. 직원을 빼앗긴 산하기관이 업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채용을 더 하더라도 공무원들이 알 바 아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참으로 바쁘다. 일일이 챙기고 지시하지 않으면 수족이 움직이지 않는다. 산업은행 총재라는 호칭도 대통령이 언급하지 않으면 당사자들은 스스로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고, 자주 틀리는 일기예보에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

지난달 28일 관광산업 경쟁력 강화회의에서 6개월 이상 걸려야 정책이 나오는 기획재정부 사안에 대한 건의가 나오자 이 대통령은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가리키며 “얘기해봤자 소용이 있겠어요. 저분이 연말까지 장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말했다. 농담이었지만 순간 침묵이 흘렀다고 한다. 공무원 군기를 잡기 위한 의도된 농담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챙기기 한계, 의식개혁 묘안 찾아야

문제는 대통령의 모든 것 챙기기와 공직사회의 무사안일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공무원들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지시를 받아야 일하는 습성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지적하면 공무원들은 지적받은 사항만 행동으로 옮기려는 경향이 있다.

건국 60년 대한민국 공직자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에게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일하는 자율성이다. 공직자 사회의 의식구조를 성인으로 바꿔놓지 않으면 대통령이 아무리 현장에 달려가고 지적해도 백년하청이 될 것이다.

김상영 편집국 부국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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