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선생 삶과 사상]臨政 이끈 民主共和政 선구자

  • 입력 2000년 3월 12일 19시 49분


“지금부터 우리나라는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이 탄생하는 엄숙한 순간입니다. 제국의 신민이 아니고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의 주인은 우리 국민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꼭 광복합시다.”

1919년4월11일 오전 중국 상하이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 건물 3층.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임시의정원 의장인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 법통성의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 출범했음을 공포하는 순간, 군주제의 청산과 아울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민주국가가 탄생되었음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좁은 회의장 장내는 감격 속에 눈물 바다가 되었다. 태극기가 물결 쳤고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이동녕은 1940년 3월13일 중국 스촨성(四川省) 치장(X江)에서 71세로 서거할 때까지 22년간을 백범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 등과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석오 이동녕은 충남 천안에서 출생한 뒤 한학을 공부하다 상경, 1896년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했다. 제국신문의 논객으로 개화 근대화 개혁 단결 등에 관한 논설을 발표하면서 정치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점차 키워나갔다. 그는 개신 유학자로서 자생적인 개화론자가 되어 서울 상동교회에 나가 이회영(李會榮) 김구 등과 친교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앞장 섰다. 여기서 김구와 첫 대면을 했고 이후 임시정부의 각별한 동지가 되었다. 7세 아래인 백범과는 평생 애국동지로, 정통 민주공화정부인 임시정부를 이끌게 된 것이다.

그 뒤 1907년 석오는 안창호(安昌浩) 노백린(盧伯麟) 등 여러 계열과 손잡고 신민회를 창건했다. 신민회의 총서기로 활약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이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 그는 1906년 이미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이란 민족학교를 설립(1906), 민족의식 교육에 전념했었다. 1910년 국권피탈로 독립운동의 필요성이 현실화되자 그는 이회영 시영(始榮) 등 6형제와 그의 가산을 정리해 서간도로 망명,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 운영했다. 인재를 지속적으로 기르는 것이 효과적인 독립운동이라는 생각으로 1910년 사관학교의 효시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그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면서 1919년까지 3500명의 패기넘치는 사관을 육성해 훗날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실전 배치,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신흥무관학교장 재직 시 그는 자신의 장남이 이 학교에서 생도로 훈련을 받다 풍토병으로 숨지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그 때 그 곳 교관들이 석오에게 아들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강권하자 “어찌 내 자식 먼저 고치겠느냐. 남의 자손을 먼저 완치시켜야 한다”고 했다. 혈육 앞에서도 공사(公私)를 우선한 그의 곧은 정신이 잘 드러난다.

기독교도인 그는 대종교에 관여하며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발기인 39명중 한 분으로 참여했다. 1차대전이 일어나고 2·8독립선언문이 발표되면서 국내외 정세는 급변했다. 3·1운동의 혁명적 기세로 그 파급효과가 커지자 석오는 2000만 민중의 총의에 따라 상하이에 국권 회복을 위한 거점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석오는 청아한 인품과 양보 겸손의 소유자였다. 남의 앞에 나서기를 꺼리고 뒤에서 남을 내세우며 사람의 결점보다는 장점을 더 부각시켰던 인물로, 임시정부의 터줏대감이며 구심점이었다.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법무총장 국모총리 주석 의정원의장 등 행정 입법부의 핵심 지도자가 되었으나 모두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벼슬은 남에게 유익하고 편안하게 뒷받침해주는 공복(公僕) 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훈계하곤 했다.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의거도 백범이 석오의 결정을 거쳐 처리한 작품이다. 여기서 드러나듯 임시 정부의 위계는 석오 백범으로 이어졌다. 이는 백범도 받아들인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석오의 자리는 대개가 백범으로 넘겨졌다. 제2차 개헌(1925)으로 대통령 지도체제에서 국무령제로 바뀔 때 백범이 국무령으로 오르게 되자 여러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석오는 “내가 책임지겠소. 임정을 강하게 이끌 사람은 백범밖에 없소”라고 소신있게 밀어 붙여 백범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임정의 선장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석오의 단합 통일정신은 매우 강하고 일관되었다. 임정 내의 파벌 논쟁이 심심치않게 벌어질 때 그는 “싸우려면 일본 놈들 하고나 싸우지 왜 동지끼리 티격태격하나. 빼앗긴 조국을 언제 찾아가지고 가겠나”라고 일갈했다. 그가 가는 곳이면 시끄러운 논쟁은 곧 잠잠해졌다. 그는 임정 27년중 22년간을 이끌다 치장땅 임시정부의 초라한 곳에서 임정 요인 엄항섭(嚴恒燮)과 김의한(金毅漢)과 그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국했다. 1940년 3월13일 오후 4시40분이었다. 석오는 임종 때까지도 “대동단결만이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고 동지들에게 당부했다.

글·이현희<성신여대교수·한국근현대사>

▼4월 독립운동가 선정…13일 효창공원서 추모식▼

북간도에 민족교육기관 서전서숙 설립(1906), 항일비밀결사 신민회 결성(1907), 항일투쟁교육기관이자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 설립(1910),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임시정부 주석 4차례에 임시의정원 의장 3차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끌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 13일은 그의 60주기다.

석오는 임시정부의 구심점이었고 민족교육 인재육성을 실천했으며 좌우익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에 매진했던 인물. 일제시대 동아일보 상하이 특파원이었던 유광렬은 “석오는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갈라져 싸울 때 고초를 당하면서도 임정을 잘 이끌어나간 훌륭한 지도자였고 겸양과 인품이 돋보이는 강직하고 깨끗한 선비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석오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찬연한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그에 걸맞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광복 이전인 1940년 타계함으로써 해방공간의 정치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광복 후까지 생존한 임정 요인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과 사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의회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고 좌우 세력의 화합과 통일을 추구했던 점 등이 그렇다.

그의 민주주의 정신과 통일 화합의 정신은 이 시대 혼탁한 정치와 민족 분단을 극복하는데 하나의 전범이 될 것이다.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석오를 ‘4월의 독립운동가’ 선정해 그의 고결한 정신을 기린다. 13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선 ‘석오 이동녕선생 60주년 기념 추모대전’(석오 이동녕선생 기념사업회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이 거행된다.

▼이동녕선생과 백범▼

“최후의 1인까지 존경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석오(이동녕)다.”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석오 이동녕에 대해 이렇게 경의를 표했다.

석오와 백범. 임시정부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으레 백범. 하지만 석오가 없었다면 백범이란 이름은 잘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백범의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순간엔 언제나 석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사실 석오의 후계자였다.

석오와 김구가 처음 만난 것은 1904년. 석오는 서울 상동교회에서 항일단체인 ‘청년회’를 만들고 거기에 무명 청년 김구를 가입시켰다. 당시 석오는 서른다섯, 백범은 스물여덟. 이 때부터 두사람은 혈맹지교의 관계로 발전했다.

그러나 석오가 1906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석오와 백범은 헤어져야 했다. 두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1919년 4월. 석오가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그 며칠 후 백범이 석오를 찾아온 것이다. 석오의 도움으로 백범은 당시 내무총장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김구는 이를 ‘임정의 문지기’로 표현했다)이 되었다. 이후 석오는 백범을 내무총장 국무령 등 요직에 추천, 임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선후배이자 동지로서, 임시정부의 쌍두마차가 되었다.

임시정부 활동이 침체로 접어들던 1926년, 백범이 강력한 항일무장단체인 ‘한인애국단’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백범을 한인애국단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이를 적극 지원한 것도 석오였다.

한인애국단에서 1932년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거사를 결행한 것 역시 석오와 백범의 작품이었다. 그로 인해 석오와 백범은 똑같이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다녀야 했다.

석오는 1930년대에 독립운동세력의 좌우 합작과 통일을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 독립운동 세력이 힘을 합치지 않고는 효과적인 투쟁이 불가능하다는 절박함이었다. 백범이 광복 후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했던 것도 석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백범은 석오를 가리켜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쓴다”고 말했다. 또한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했으니 그것이 일생의 미덕이었다”며 경의를 표했다. 백범은 광복 후, 석오의 유해를 조국에 안치했다.

평생을 선후배이자 동지로서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석오와 백범. 두 거목은 죽어서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나란히 묻혔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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