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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2월 7일 19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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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룽지(朱鎔基)중국총리가 부하들에게 이런 말을 내지른 것은 지난 봄이다. 하나는 경제개혁에 실패하면 자신이 들어갈 관이고 99개는 적(敵)들을 집어넣을 관이라고 했다.
적이란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국영기업 은행 등의 구조조정과 국내외 경쟁체제 도입에 한사코 저항하는 관료 공기업체장 은행장 등 개혁반대세력을 뜻했다. 그는 ‘내가 죽더라도 저들을 다 쓸어내야 이 나라에 장래가 있다’고 했다. 전임총리인 리펑(李鵬)전국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장 등 막강한 강경보수파들이 그를 줄기차게 옥죄던 상황에서였다.
지난 여름 주총리는 반대파의 집중반격을 받으며 실각설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9월 ‘국영기업 개혁을 3년 내에 완결하겠다’고 거듭 공언했다. 그리고 지난달엔 거대한 통신시장의 독점 해소 등을 약속하면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한 미국과의 협상을 성공시켰다.
이로써 ‘정치생명을 버릴 각오로 개혁하는 지도자’ 주룽지의 입지는 오히려 강화됐다. ‘주총리는 청렴결백하다’는 국민의 신뢰와 옳은 것을 위해선 야합하지 않는 결연하고 일관된 자세가 그의 힘이 아닐까 싶다.
▼정권개혁부터 실패▼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주룽지처럼 개혁하는 지도자일까. 김대통령이 당선자 시절부터 2년간 앉으나 서나 강조해온 개혁은 우선 자신에게 확고하게 의식화 체질화돼있을까.
우리 경제를 뿌리부터 잎새까지 비틀리게 해놓은 정경유착, 권력층과 정책관료들이 떡 주무르듯 해온 금융관치(官治), 수조원 수십조원의 혈세를 꿰차고 오남용(誤濫用)을 밥먹듯 해온 정부와 각종 연금기금 운용자들, 경쟁무풍(無風) 속에서 철밥통 끌어안고 경영난맥 인사난맥에 함몰돼온 공기업, 철근도 없이 썩은 서까래로 지어올린 마천루같은 부실기업, 고비용 저효율 경제를 구조화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노동부문…. 무엇보다도 이 나라 경제시스템이 아무리 효율화 고도화 선진화되더라도 그 상위개념으로 존재할 정치….
김대통령은 과연 정치생명을 담보로 내놓고서라도 이들 부문을 개혁할 의지가 있었던 것일까. 김대통령은 밤잠을 설쳐가며 개혁하려 했지만 받쳐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 만약 후자라면 개혁의 파트너와 중간설계자, 현장책임자들을 잘못 고르거나 잘못 지휘한 책임 또한 김대통령에게 있는 건 아닐까.김대중정권은 우선 정부와 공동여당 내부의 의식개혁 체질개혁에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부터 단추를 잘못 채웠다고 생각된다. 정부와 공동여당 내의 핵심층부터 바뀐 의식, 달라진 체질을 다수 국민과 시장에 분명히 보여주었다면 상황이 많이 변했을 것이다.
▼안바뀌는 경제관행▼
어느 기업인은 말했다. “솔직히 말해 요즘 재벌들, 구조조정보다 줄대기에 혈안이 돼 있어요.”
한 은행임원은 말했다. “관치금융이 박정희(朴正熙)정권 때보다 더 심해요.” 정권교체와 함께 관치권력의 인적 물갈이가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이 변화라면 변화지만 시장의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겐 별 의미가 없다.
정부와 여당이 재정적자감축 특별법을 만들어보겠다고 잠시 발심(發心)하더니 슬그머니 말아넣은 것이 재정개혁의 현주소다.공기업개혁은 빼든 칼을 칼집에 집어넣기에 급급하다. 공공부문의 ‘정치 패거리’ 낙하산인사는 아무리 비판해도 그칠 줄 모른다. 그러고도 노조들에 개혁을 요구할 배짱이 생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부는 2002년부터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을 금지하는 노조법 조항을 올해 안에 개정하겠다고 6월 노동계에 약속해버렸다. 97년 3월 여야 합의로 입법한 것을 고치겠다는 얘기였다. 이같은 무원칙이 지금 노동계와 재계간의 격렬한 대립을 낳고 있다. 그러면서 환란(換亂)극복 잔치를 벌이고 10% 성장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이러니 노동자들이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치개혁에 대해선 말하기조차 싫다.외국인들은 앞다투어 한국정부의 개혁성과를 칭찬하는데 웬 딴죽이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잣대가 우리의 잣대일 수는 없다. 머리 쓰다듬으며 포켓 더듬는 외국인이 없다고 장담할 일이 아니라면….
IMF체제 2년은 위기상황이었기 때문에 개혁의 호기(好機)였다. 하지만 결정적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2년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정부는 개혁의 원점에 다시 서야 한다.
배인준<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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