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30년 동안 먹고 살기가 나아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간 사람값이 떨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곳이 현재의 한국사회다. 대접을 받으려면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큰 차를 몰거나 돈이 많거나 정치적 권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보통사람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대접을 기대하기 힘들다.
▼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 ▼
자동차를 타고 운전대를 잡으면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그저 차량의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운전자에게 보행자들은 주체적이고 귀중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차량의 흐름을 위해 지하도와 육교가 곳곳에 서 있다. 노인이나 어린이가 몹시 불편하리라는 사실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녹색신호등을 믿기보다는 생존본능에 따라 주위를 살피고 뛰다시피 건너야 한다. 개선을 하네 어쩌네 해도 서울시의 보행자신호가 짧은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반쯤 건너면 벌써 불안한 깜박임이 걸음을 재촉한다. 분명히 녹색 보행자 신호가 켜져 있어도 우회전하는 차들은 사람들을 헤치고 밀치고 달아난다. 외국의 도시들을 좀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아는 도시는 없다.
여름에 거리를 걷다보면 음식냄새가 섞인 후끈한 온풍에 질겁하게 된다. 거리의 상점들마다 에어컨을 설치하고 그 송풍기를 길가 행인 다니는 쪽으로 설치한 것이다. 가게주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게에 들어온 사람은 대접해야 할 소중한 손님이지만 일단 가게를 나서면 아무 상관없는 대상이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지나가는 사람은 무슨 꼴인가. 요즘도 학교 주변 통닭집 앞에 흉한 몰골로 쉬고 있는 대형 에어컨송풍기를 보면 부아가 치민다.
기업들도 사람 대접 않기는 마찬가지다. 경영합리화와 리엔지니어링을 부르짖는 기업들의 입장에서 직원들은 거대 조직을 움직이기 위한 부품이요, 이윤을 갉아먹는 비용이다. 어떻게든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삐걱거리는 부품은 교체해야 한다. 불황이 닥치면 모든 죄는 직원들이 뒤집어쓴다. 「명퇴」와 「조퇴」 바람 속에 직장인들은 혹시 자신이 능력없이 월급만 축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자괴감에 움츠러든다.
사람 귀한 줄 안다면 정치판에서 어찌 이런 작태가 있을 수 있는가. 국민이 뽑아준 선량이라는 자들은 서민들이 곤한 잠을 자는 새벽에 날치기로 법안을 통과시켜 놓고 민심을 팔아먹는다. 서민들은 동그라미 몇 개인지 어림잡기도 힘든 5조원이라는 돈을 부실기업에 대출해주고, 그 과정에 개입해서 「떡값」 챙긴 힘센 사람들은 너도 나도 발뺌이다. 결국 부담은 애꿎은 국민이 지게 생겼다.
▼ 부담은 애꿎은 국민이 ▼
우리는 60년대 중반 이후 짧은 기간 놀랄 만큼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 결과 물질적 풍요 속에 제법 여유 있는 소비를 즐기게 되었다. 이제는 멈춰서서 과연 무엇을 위한 경제발전이고, 무엇을 위한 소비생활인지 돌이켜 볼 때가 아닐까.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 높은 사회보다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김철규<고려대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