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3가쪽으로 걸어가는데 메케한 따가움이 숨을 콱 틀어막는다. 서둘러 돌아 나와 조그만 술집으로 향했다. 얼마 후 다시 나가니 이제는 숨이 막히지 않는다. 역시 자연의 힘은 위대하다. 금방 최루가스를 희석시켜 버리다니. 전철역으로 가는데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팔에 팔을 끼고 구호를 외치며 다가오는 군중이 보였다. 마치 꿈 속의 장면같이 아스라했다.
▼ 최루가스와 군중들 ▼
1997년이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인류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다. 그 예언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이상 기후와 경제 불안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무언가 방향 감각을 상실한 것 같은 우리 사회 분위기를 보면 마치 엄마잃고 방황하는 소년을 보는 것만 같다. 이대로 가면 말세가 정말 오는 게 아닐까. 말세가 온다면 아마도 생명력이 더 이상 발휘되지 않아서일 게다.
생명은 자손을 통해, 생명의 빛을 통해 다음 생으로 퍼져가야 하는데 저마다 자기 삶에만 이기적으로 열중하고 다음 생을 소홀히 한다면 그 생명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자식을 팽개치고 혼자만 잘 살겠다고 갈라서는 부모, 눈앞의 이익에만 골몰한 정치가, 일단 챙기고 보자는 공무원들은 말세에 공이 혁혁한 주범들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미움을 전파하고, 자기 이익에만 골몰한 정치가는 국민을 살얼음판으로 내몰고, 자기 것만 챙기는 공무원들은 국민의 삶의 터전을 사상누각으로 만들테니 말이다.
개인을 보호하는 부모도 부모 역할을 등한시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부모」도 그러하다면 자식은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없는 아기는 금방 죽고 아이는 비실거리며 청소년은 방황할테니 말이다. 말세를 극복하는 지혜는 부모다움을 회복하는데 있지 않을까 한다. 부모다운 부모가 있어야 자식들은 씩씩하게 자라 다음 생을 또 책임지는 것이다.
사랑받고 자란 자녀는 절대 그 사랑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포근한 어머니도, 보호해주는 강인한 아버지도 잘 발견되지 않는다. 방향 감각을 잃고 아우성치는 아이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있어야 할 엄마나 아빠가 뒷짐지고 자기 살 길만 따지고 있다면 그리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런 엄마 아빠에게 매달린들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미 혼자만 살겠다고 마음이 돌아선 부모를 설득할 길은 아무 데도 없으니 말이다. 심지어 어떤 여자는 남편이 자기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울부짖으며 매달리는 갓난아기를 두고 냉정하게 갈라서기도 한다. 위자료나 많이 챙겨서….
부모가 떠났을 때 자식이 살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밖에 없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마음을 빨리 버리고 혼자 서는 것이다. 소년소녀 가장들이 그러하듯 스스로 현실감과 자기 인생에 책임감이 있는 성인으로 빨리 솟는 것이다. 영웅들은 의외로 이런 사람들중에서 많이 나온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에서는 영웅의 조건으로 어린 시절에 일찍 부모에게서 떨어져나오는 것을 들기도 한다. 헤라클레스나 모세는 부모를 일찍 떠났기에 그렇게 영웅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방향중심축」은 어디에 ▼
우리 국민은 그동안 권위나 독재 등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부모 밑에서 자라느라고 개인적으로 강인함을 단련할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 그런 부모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테니 그 와중에 도태되는 개인도 많겠지만 강인하게 거듭나는 개인도 많아질 것이다. 그중에는 그동안 나오지 못했던 영웅들도 탄생하면서. 그러한 영웅들이 새로운 성숙한 부모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때 우리 사회의 지평은 한층 더 밝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김 정 일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