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여보, 우리 이제 신혼여행 가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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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스타트 초대 챔피언 등극
‘큰 대회 앞두고 결혼’ 고민했지만 “우승 자신있다” 작년 6월 식 올려
14바퀴까지 선두 추격하며 희생, 17세 정재원 금메달 특급조력자

이승훈이 24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매스스타트 결선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하고 있다. 이승훈은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첫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매스스타트 ‘초대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강릉=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승훈이 24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매스스타트 결선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하고 있다. 이승훈은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첫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매스스타트 ‘초대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강릉=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양 주먹을 불끈 쥐며 가장 빨리 결승선을 통과한 이승훈(30)은 트랙 한 바퀴를 돈 뒤 함께 레이스를 펼친 대표팀 막내 정재원(17·동북고)을 껴안았다. 정재원과 함께 태극기를 거머쥔 채 그는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정재원은 물론 자신을 이 자리로 이끌어준 모두를 위한 감사 인사였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간판스타 이승훈이 24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 겨울올림픽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레이스 막판 폭발적인 스퍼트를 뽐내며 7분43초97로 정상에 올랐다. 본인 스스로 가장 값진 메달로 꼽을 정도로 의미가 큰 메달이었다. 겨울올림픽 남자 매스스타트의 초대 챔피언이 됐고, 아시아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최다 메달 기록도 5개로 늘렸다. 2010년 밴쿠버 대회(1만 m) 이후 8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선수단에 다섯 번째 금빛 선물을 했다.

○ 금빛 질주 도운 특급 조력자, 정재원

지금의 이승훈을 만든 건 자신의 땀, 눈물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도움도 컸다. 이날 결선에서는 정재원(17)의 도움이 빛났다. 팀추월(은메달)에서도 이승훈과 호흡을 맞췄던 그는 이날 이승훈의 특급 조력자 역할을 했다.

전체 16바퀴 중 5바퀴째부터 중간그룹 선두로 나선 정재원은 선두그룹과 거리가 벌어지지 않도록 레이스를 펼쳤다. 통상 그룹 선두에 서면 바람 저항을 많이 받음에도 불구하고 14번째 바퀴까지 그 역할을 자처했다. 그 덕분에 이승훈은 선두그룹과 격차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체력을 비축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바퀴에서 대역전극을 완성했다.

경기 뒤 정재원은 “월드컵 경기를 봐도 (앞으로) 치고 나가는 선수는 있어도 그 간격을 좁히는 선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 역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들어갔다. 승훈이 형이 앞으로 치고 나가는 걸 보고 내 역할은 끝났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레이스 막판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결승선을 가장 늦게 통과한 정재원은 세 번째 스프린트 구간에서 얻은 1점으로 최종 8위를 했다. 이승훈은 고마움의 표시로 정재원이 평소 갖고 싶어 하던 자전거를 사줄 계획이다.

평소 정재원을 비롯해 많은 후배가 닮고 싶은 선배로 꼽는 이승훈은 이번 대회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이 역대 가장 많은 메달(7개)을 따는 데도 선봉 역할을 했다. 그는 “후배들이 너무 잘해줘서 대견스럽다. 단거리, 중거리 종목에서 메달을 땄다는 게 너무 좋다”면서도 “아직 5000m, 1만 m 종목 후배들은 더 분발해야 한다. 나를 뛰어넘는 후배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 자극제가 된 후배, 임효준

숨은 조력자도 있었다. 이번 대회 쇼트트랙 남자 1500m 금메달리스트 임효준(22)도 이승훈의 레이스에 큰 도움이 됐다. 사연은 이렇다. 2014년 소치 대회 이후 이승훈도 2016년 말 한때 고비를 겪었다. 더 이상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나태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그의 도전의식을 강하게 자극한 선수가 바로 한국체대 후배 임효준이었다. 전명규 교수(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의 지도로 한체대 쇼트트랙 훈련장에서 함께 훈련하면서 임효준의 스케이팅 실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전성기 시절 안현수(러시아명 빅토르 안)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를 받은 임효준은 코너워크는 물론 장거리 훈련에서도 이승훈에게 크게 뒤지지 않았다. 장거리에서만은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였기에 충격이 컸다.

후배의 실력에 자극을 받은 이승훈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훈련에 매진했다. 이듬해 8바늘을 꿰매는 다리 부상 속에서도 삿포로 아시아경기 4관왕을 차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 부담 아닌 책임감 키워준 결혼 생활

아내 두솔비 씨(27)와의 결혼도 그에게 날개가 됐다. 통상 큰 대회를 앞둔 선수들이 그렇듯, 이승훈도 결혼 시기를 두고 한때 고민했다. 자칫 성적이 떨어졌다간 결혼 생활이 경기력에 영향을 미쳤다는 반응이 나올까봐 걱정됐다. 그러나 확신이 있었던 이승훈은 지난해 6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생활을 통해 “책임감을 갖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신혼여행까지 미뤄가며 훈련에 매진한 그는 약속대로 아내에게 은메달에 이어 금메달까지 선물하게 됐다.

이승훈은 “오랜 시간 묵묵히 지원해줘서 국민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모두 아내 덕분이다. 사랑한다. 우리 이제 여행 가자”고 아내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승훈에겐 영영 잊지 못할 달콤한 우승 소감이었다.
 
강릉=강홍구 windup@donga.com·이헌재 기자
#평창 겨울올림픽#스피드스케이팅 이승훈#남자 매스스타트#정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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