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거리」읽기]그늘진 청계천

  • 입력 1999년 2월 22일 19시 25분


“너는 청계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심지어는 아이도 버리고 주워오는(?) 곳, 청계천은 어떤 곳이었을까. 청계천은 서울의 하수도였다. 조선 6백년간 도성의 백성들은 버리고 싶은 것들은 모두 퍼담아 청계천에 버렸다. 굳이 청계천에 버리지 않았어도 수채 구멍을 통한 물은 모이고 모여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가뭄이 되면 쌓인 쓰레기와 배설물의 냄새가 도성을 진동시키고 홍수가 나면 범람하여 쓰레기를 돌려주던 곳.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때는 1910년대. 그 전에는 그냥 개천(開川)이었을 따름이다. 태어나면서 저주받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근원부터 탁한 샘물은 어디 있으랴. 청계천도 상류에는 분명이름만큼맑은 물이 흘렀을 것이다. 박태원의소설 ‘천변풍경’이그려내는 빨래터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청계천변의 세상은 두 종류로나뉘었다. 석축위의 세상과 아래의 세상. 석축위로는 가마를 탄 아씨가 지나가도 석축 아래 빨래터에는내일 아씨가 입을 저고리를 빨아야 하는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저고리가 깨끗해지는 만큼 물은 탁해졌다. 석축 아래로는 쓰레기가 쌓였고 거지, 땅꾼들이 모여들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기보다 가리는 것이 더 쉬웠을까. 난마(亂麻)같은 하수관 위에 첩첩이 쌓이는 건물들을 정비해서 하수처리장을 만들고 청계천에 맑은 물을 흐르게 하기에는 도시의 역량은 부족하기만 했으리라. 일제시대 때부터 시작된 복개공사는 1978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빨래터도 묻혔고 청계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였다는 수표교(水標橋)는 장충공원으로 옮겨졌다. 제일 넓던 다리, 광통교(廣通橋)는 지금은 장난감 같은 모형으로 만들어져 조흥은행 본점 모서리에 쪼그리고 있다. 덮인 청계천 위로는 고가도로까지 마련되었다. 그 위로는 두 발로는 올라갈 수 없고 네 바퀴로만 올라갈 수 있다.

청계고가도로는 3·1빌딩과 함께 이 땅의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둘이 다정히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은 외국에 나갈 홍보책자에 반드시 끼어 들었다. 3·1빌딩과 똑같이 생긴 건물을 미국에서 보았다고 수군거려도 못들은 체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신나게 자랑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을 흉내냄은 이 땅에서 길이요, 진리가 아니었던가.

청계고가도로는 야심이었다. 우리도 미국처럼 자동차를 타고 바람처럼 도시를 질주한다는 도시고속도로는 가슴 벅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심으로 자동차를 불러들이는 것이 마약임은 깨닫지 못했다. 도시의 주위를 순환하는 고속도로는 필요해도 관통하는 고속도로는 위험하기만 한 발상이다. 과연, 흉내는 냈는데 효과는 달랐다. 폭은 좁았고 오르내리는 경사는 급했다. 몽롱한 마약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고 밀려드는 자동차가 도로를 메웠다. 장안 최고의 추물이니 어서 허물어야 한다는 성토도 쉬지 않고 불거져 나왔다. 해결이 아니고 문제가 되었다.

청계천에는 여전히 위 세상과 아래 세상이 있다. 당신은 지금 시속 70㎞의 속력으로 고가도로를 달려 명동의 백화점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아래에서 발을 멈추고 1천원에 네개하는 칫솔을 고르고 있는가. 청계천 2가의 한화빌딩은 재개발지구의 끝단이다. 여기서 고가도로가 시작되고 그 짙은 그늘 아래 재개발의 칼날이 닿지 않은 청계천거리도 시작된다. 거짓말처럼 갑자기 간판, 공구, 조명기구를 파는 가게들이 등장한다. 보도에 깔린 재료도 매끈한 돌에서 텁텁한 아스팔트로 바뀐다. 도색잡지의 모델들도 보신원의 무시무시한 뱀들 사이에서 오가는 행인을구경한다. 가게를 기웃거려보자. 금방 “뭐 찾으세요? 들어와서 구경하세요”하는 초대장이 전달된다. 이곳은 능력만큼 값을 깎는 곳. 눈치와 고집으로 무장하고 초대에 응하라.

청계천의 가게들이 거리를 면한 폭은 2∼3m에 지나지 않는다. 어두운 가게의 속은 거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가게 안에서 칡뿌리처럼 연결된 창고와 골목길은 끝없이 이어질 듯한 도시의 마술상자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산과 유통과 판매의 복잡함을 거리에 서서는 알 길이 없다.

밤이 되면 밝아지는 동대문시장과 낮이 되면 어두워지는 장물시장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리. 한낮에도 소방관을 악몽에 시달리게 하는 동굴. 그 곳은 건축가가 제도판 위에서 꿈꿀 수 없는 공간의 수수께끼다.

겹겹이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정글의 논리로 엮여지던 청계천. 가진 자는 옳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르다. 그 역사는 수많은 젊음을 제물로 삼는 번제(燔祭)를 요구했다. 청년 전태일이 스물두 살 젊기만한 몸을 태워 밝히려던 바로 그 어두움의 현장이 이 곳이다. 과거를 잊자는 듯 평화시장은 밖에 하얀 패널을 붙이는 화장을 했다. 얼굴에종기와 부스럼이 나기 시작하면 내장을 청소해야하건만 더 짙게 화장을 하기만 했다. 건물의 표피보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 담아내는 인생이다. 무려 6백m 길이의 건물을 한가지 패널로 감쌌으니 건물은 깨끗해지기보다 무표정해졌다. 거리는 밝아지지 않고 오히려 답답해졌다. 시장안은아직도 어둡기만 하다.

고가도로를 지나다 보니, 청계천 8가 황학동의 3·1아파트가 도시 미관을 해친다고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서울에도 이런 데가 있느냐고, 재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막상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지는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인생이 가야할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았다.

황학동 시장은 청계천 2가를 압도하는 국제경쟁력을 갖고 있다. 한화빌딩은 위대한 색채의 오류. 살색과 주황색의 패널, 반사유리와 맑은 유리가 아치 모양처럼, 혹은 난수표처럼 붙어있다. 이 건물은 감춰도 좋을 우리시대의 색채감각을 과감히 보여주고 있다. 앞거리에 찬바람만 부는 그런 재개발로 황학동 시장을 감춰버릴 수는 없다.

어느 도시에나 양지도 있고 음지도 있다. 그 밝음과 어두움의 편차가 클수록 사회의 갈등은 커진다. 어두운 거리는 가리는 것이 아니고 밝혀야 한다. 청계천은 우리 사회의 음지가 얼마나 밝고 어두운지를 읽어주는 조도계(照度計)다.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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