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준의 재팬무비]잡지 수준은 개판, 극장 수준은 일등급

입력 2000-11-07 11:54수정 2009-09-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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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경우, 영화 전문지 독자와 영화 관객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합니다. 그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습니다.

영화 전문지는 기타노 다케시, 빔 벤더스, 박광수 감독처럼 예술적 성향이 강한 감독들에 대한 기사는 많이 다루지만 이들의 영화 흥행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한 소식은 좀처럼 접하기 힘듭니다. 영화 전문지들은 너나 없이 칸영화제에 관한 기사를 특집으로 다루는데, 정작 칸영화제에서 반향을 일으킨 영화들 중 국내 흥행에 성공한 예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10만 명도 넘는 전문지 애독자의 반만 영화를 봐도 '본전'은 어렵지 않게 건질 텐데 예술 영화는 왜 개봉하는 족족 망하기만 하는 걸까요.

이런 경우를 자주 보다 보니, 혹시 전문지 독자들이 작품 자체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허영기를 채워주는 '목록'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일본은 좀 다릅니다. 우리 나라 전문지들처럼 영화제 기사를 대대적으로 다루는 영화 전문지는 일본에 없습니다. 어깨의 힘을 완전히 빼고 있다고 할까요. <스크린> <로드쇼> 같은 일본의 영화 잡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할리우드 기사 일색이어서 말 그대로 할리우드 영화(또는 스타) 홍보지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걸까.'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나마 <키네마 준보> <플릭스> 등의 잡지가 수준 있는 일본 영화 소식이나 예술 영화 기사를 전하지만 판매 부수나 영향력 등으로 따져볼 때 미약한 수준입니다. <플릭스>는 과거, 예술 영화 기사를 주로 다루었는데, 판매 부진으로 요즘에는 아예 스타 인터뷰 전문 잡지로 성격을 바꾸었더군요. 게다가 월간지에서 계간지로 바뀌었고요. 그밖에 <카이에 뒤 시네마> 일본판,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라퍼> 일본판이 있습니다만, 번역판인 데다 판매가 부진하긴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일본 출판계에서 권위 있는 영화 전문지(우리 나라의 <씨네 21>이나 <스크린>같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 일본 잡지 시장에서 예술 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루겠다는 생각은 망하자는 생각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키네마 준보>의 편집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니 꽤 신빙성 있는 사실일 겁니다.

일본 영화 박스오피스에서도 할리우드 영화가 판을 칩니다. 10월28일과 29일 이틀 동안 도쿄 극장가 흥행 성적을 보면 1위 <태양의 법>(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 2위부터 7위까지 모조리 할리우드 영화입니다. <할로우 맨> <엑스 맨> <키드> <너티 프로페서 2> <뉴욕의 가을> <배틀 필드>…. 영화 전문지들이 할리우드 영화 기사만 주로 다루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싶습니다.

그렇다고 예술 성향의 '지루한' 영화들이 우리 나라처럼 개봉되기도 어려울뿐더러 개봉시 처참한 흥행 성적을 기록하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일본 도쿄에는 소극장이 꽤나 많습니다. 이들 소극장들은 나름대로의 개성과 자존심으로 경영되고 있습니다. 몇 달째 데이비드 린치 영화만 줄곧 틀어대는 소규모 영화관도 있습니다. 도호나 쇼치쿠 같은 메이저 영화사가 관리하는 전국 체인망 영화관에서는 할리우드 영화와 일본 상업영화가 주로 상영되지만 이들 소극장에서는 예술 영화나 인디펜던트 계열의 영화들이 상영됩니다.

처음에는 소규모 극장주들이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장사하는 줄 알았습니다. '불타는 예술혼과 사명감으로 적자를 감수하면서 극장을 꾸려나갈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입니다. 아니면 정부의 지원을 뭉텅이로 받거나.

그런데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런 극장을 경영해서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메이저 극장들이 벌어들이는 돈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액수지만, 어찌됐건 돈을 벌고 있었던 겁니다.

이를테면 쿠바 음악을 주제로 한 빔 벤더스 감독의 디지털 다큐멘터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영화는 딱 한 극장에서 개봉되어 1억 엔(11억 원)도 넘는 수입을 올렸다는 것 아닙니까. 물론 이 영화는 유별나게 흥행이 잘된 경우지만, 아무튼 처음에는 예술 전용관을 표방했던 극장들이 세월이 좀 흐르면 예외 없이 상업 영화 전용관으로 탈바꿈하는 우리 경우와는 사정이 많이 다른 셈입니다.

전문지는 세계 어디보다 수준이 높은 반면 극장 사정은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우리 나라. 잡지는 유치할 정도라도 극장 수준은 세계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는 도쿄. 어디가 더 바람직할까요. 만약 도쿄 쪽이 더 바람직한 것이라면, 우리는 누굴 탓해야 할까요.

김유준(영화칼럼리스트) 6609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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