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고궁은 도시의 에어컨

  • 입력 2002년 5월 7일 17시 39분


도시 건물에 둘러쌓인 덕수궁
도시 건물에 둘러쌓인 덕수궁
《창덕궁 등 고궁이 ‘도심의 에어컨’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건국대 지리학과 권영아 박사와 이현영 교수는 “창덕궁 등 고궁이 도심보다 기온이 낮고, 시원한 바람을 내보내 주변 지역의 온도까지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난달 25일 열린 한국기상학회에서 발표했다. 녹지가 많은 고궁이 도심보다 기온이 낮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권 박사는 2000년 6월부터 창덕궁, 창경궁, 종묘 등 서울에 있는 3개의 고궁과 주위 지역 22곳의 기온을 6개월 동안 조사했다. 이 결과 6∼8월에 고궁 안의 기온은 이곳에서 600m 떨어진 혜화동 로터리 일대보다 3∼4℃나 낮았다.

고궁은 주변 온도까지 낮췄다. 서울의 열 상태를 찍은 위성 사진을 보면 종로 시내에서 고궁에 가까이 갈수록 기온이 떨어진다. 이번 연구에서도 혜화동 로터리에서 고궁 쪽으로 다가갈수록 한여름 기온은 200m마다 1∼2℃ 떨어졌다. 고궁 안의 시원한 공기가 바람을 타고 주변으로 퍼져 기온을 낮춘 것이다. 고궁 중에서도 녹지가 많은 창덕궁이 ‘에어컨 효과’가 가장 높았으며, 크기가 작은 강남의 선릉도 ‘에어컨’ 역할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권 박사는 “3개 고궁을 더하면 넓이가 0.86㎢ 정도로 웬만한 공원을 능가한다”며 “이곳에 조성된 숲이 도시의 온도를 낮추는 ‘차가운 섬(냉섬)’이 된다”고 설명했다.

인구가 많은 도시는 온도가 매우 높은 ‘열섬’이 된다. 그러나 도시 안에 만들어진 작은 냉섬은 열섬을 조각조각 잘라 열섬 효과를 낮춘다. 무분별한 도시 개발 속에서 살아남은 고궁이 이제 도시의 숨통까지 틔워주는 것이다. 게다가 도시의 공원은 공기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대기오염물질이 빨리 확산되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한다.

고궁은 아니더라도 도심의 숲이나 나무가 도시의 기온을 낮춘다는 연구는 최근 많이 나오고 있다.

여름 기온이 높기로 유명한 대구시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4년 동안 436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계명대 김수봉·김해동교수팀(환경학부)의 조사 결과 97년부터 99년까지 3년 동안 대구시의 기온은 1.2℃나 떨어졌다. 대구시는 앞으로 2005년까지 매년 나무를 100만 그루씩 심어 대구를 ‘시원한 도시’로 바꿀 계획이다.

미국 등은 지역 대학에서 냉방에 좋은 나무를 선정하고 주민들이 이 나무를 집 주위에 심어 도시의 온도를 낮추고 있다. 한국임업연구원도 올해부터 가로수가 도시 냉방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숲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온을 낮춘다. 나무가 광합성을 하면 잎에서 물이 나오는데 이 물이 증발하면서 주변의 열을 빼앗는다. 또 넓게 드리워진 숲은 태양의 복사열을 차단하고, 바람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해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가게 할 수 있다.

강원대 조현길 교수(조경학과)는 “지름 16㎝의 나무 한 그루는 하루동안 24평형 에어컨 1대를 12시간 동안 가동하는 만큼의 냉방 효과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한국 도시의 녹지 비율은 대부분 10∼15% 인데 이를 10% 포인트 높이면 도시의 평균 기온이 0.6∼1℃ 정도 떨어진다. 조 교수의 연구 결과 여름철 냉방 에너지는 약 10% 낮출 수 있으며, 강원도 춘천시의 경우 가구당 1년에 3만1000원을 아낄 수 있다.

계명대 김수봉 교수는 “도심 속의 녹지는 열섬 효과를 낮추는데 매우 효과적”이라며 “한국 도시는 녹지 비율을 20%까지만 올리면 도시 기온을 낮추고 기후를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상연 동아사이언스기자 dre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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