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너무나 ‘약골’ 한국 애니메이션

  • 입력 2001년 7월 13일 11시 36분


'미녀와 야수’ ‘포카혼타스’에서 애니메이터로 활약한 글렌 킹은 “디즈니가 슬펌프에 빠진 시기에 우리에게 지탱할 힘을 준 것은 미야자키 작품으로 대표되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토이 스토리’의 존 래세터 감독 역시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은 거의 모두가 미야자키 감독의 팬입니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만화영화 ‘노틀담의 꼽추’를 만든 커크 와이스와 게일 톨스데일 감독 또한 미야자키 작품에 푹 빠진 적이 있다.

따라서 지난 14일 개봉한 또 하나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이 일본의 여러 작품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아틀란티스~’가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 ‘원령공주’ ‘천공의 성 라퓨타’의 등장인물이나 이미지 등을 연상케 한다는 것. 어찌 되었든 미야자키 하야오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싫어한다. 왜 그럴까. 보통 실사영화를 닮아가려고 하는 ‘디즈니식’이 애니메이션 본래의 정신과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는 28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개봉하는 3D 애니메이션 ‘파이널 판타지’만 해도 그렇다. 미국 콜롬비아 영화사가 제작한 이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머리카락과 옷의 주름뿐 아니라 피부의 질감과 얼굴 표정까지 정교하게 표현하는 기술’을 홍보의 주요 대목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3D 애니메이션은 이제 더 이상 만화영화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사영화에까지 표현영역을 넓힐 것이다. 3D 애니메이션 기술의 진보는 보다 리얼하고 정교한 현실의 표현을 가능하게 해 사실상 머지 않은 미래에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 자체가 무너질 것이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만화영화가(그것이 펜화이든 2D나 3D이든) 점점 더 실사영화를 닮으려 한다면, 만화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미야자키는 ‘정말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은’ 초당 24 프레임을 사용하는 풀(full) 방식의 애니메이팅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기법을 완성했다. 미야자키의 독특함과 위대함은 바로 이런 대목에 있는 듯하다.

▼중국 ‘보련등’ 디즈니 ‘뮬란’ 눌러▼

문제는 우리 애니메이션이 디즈니도 아니고, 미야자키도 아니며, 일본 뉴에이지 애니메이션도 아닌 독특한 ‘한국식 애니메이션’을 창조해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애니메이션업계가 동양적인 수묵화 기법으로 표현한 애니메이션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과 같은 독창성을 발휘할 여지가 있느냐는 것. 중국 최대의 애니메이션 제작기지인 상하이미술영화제작소가 3년 동안 1200만 위안(약 15억 원)을 들여 만든 ‘보련등’ 같은 작품은 지난 99년 중국에서 개봉한 지 석 달 만에 무려 1500만 명의 관람객을 모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개봉하고 중국을 무대로 한 디즈니의 ‘뮬란’을 거뜬히 누른 것이다. 이 작품은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인정 받아 현재 동남아 각지에 수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동양적 정신’에서 출발한 동양적 기법이 서양의 애니메이션을 누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오늘날 우리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재패니메이션과 월트 디즈니의 비교우위는 주로 테크닉 쪽에서만 거론한다. 작품성보다는 기획 제작 마케팅이 우선적으로 말해지고, 제작비가 얼마고 펀드를 얼마나 모았는지가 애니메이션 제작의 모든 것인 양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제작비가 극영화의 3배는 기본이고 제작기간을 짧게는 2년 이상 투자해도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것이 애니메이션이라지만, 평범한 제작기획서 내용만 봐도 최고 680% 이상, 최저 150%의 고수익을 낳는 황금알로 포장한 것이 우리 애니메이션 업계의 현실이다. 이는 곧 ‘묻지 마 투자’로 이어지는가 하면, 정부 추진의 영상산업진흥정책에 힘입어 작품규모도 커지고 기술적·제도적 발전에도 주의를 돌리게 되자 이 분야의 평균임금이 2배 이상 치솟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월급은 고사하고 일당 한푼도 못 받는 일이 아직도 허다하다. 원인은 우리 애니메이션 산업이 외국 메이저급 제작사의 수익률만 그대로 빌려 왔을 뿐, 우리는 아직까지 한번도 이뤄보지 못한 일을 ‘투자자의 꿈’으로 헤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품의 질 또한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시나리오로 급조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가장 중요한 초기 기획단계가 운이 좋아야 6개월인 경우가 흔하다. 보통 2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의 준비 단계를 거치는 외국 애니메이션의 경우와 너무나 비교가 된다. 덕분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베끼다 못해 말과 행동까지도 따라가는 일이 비일비재한다. 누가 봐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아류작으로 느껴지는 작품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곤혹감은 관객들이 더 심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거부감은 깊어만 간다. 관련 홈페이지 게시판을 아쉬움과 욕설로 채우는 일도 흔하다.

일본 제작사에서는 애니메이터들이 입사 때부터 연필깎기 심부름을 하며 일을 배운다. 심부름을 통해 그들은 선배 장인들의 정신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용병처럼 모인 기술자들이 저마다 하청 받은 미국식과 일본식 애니메이션의 제작방식 차이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심지어 용어 자체도 통일된 것이 없다. 최근엔 붐을 이루는 컴퓨터 영상 합성이라는 기술의 벽 앞에서 그저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우리 제작사의 기획 자체가 얼마만큼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모험인지….

어느 어린이 만화 그림대회에서 자기 캐릭터를 그리지 못한 아이가 스케치북 표지에 그려진 일본 만화 주인공을 따라 그리자 엄마의 칭찬을 듣고 곧 주위의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그 그림을 따라 그리기 시작한 해프닝을 본 적이 있다. 요즘 들어 활성화하고 있는 아마추어 만화가 전시장의 그림을 보아도 상황은 다를 것이 없다. 의상에서부터 표현까지 정교할 정도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복사해 놓고 누가 더 잘 그렸는지 따지며 서로 말싸움까지 한다. 더욱이 만화 보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출판사의 경우 작가 리스트를 보아도 일본작가 100명 중 한국작가 10명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간단한 일본어를 하지 않으면 만화책도 읽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른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만들 것인가▼

애니메이션 선진국의 경우 어린이에게 유해한 영향은 없는지 색깔의 지정까지 세밀하게 살피고, 립싱크 처리한 입 모양이 맞지 않으면 수입 자체를 거부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예를 들어 지브리 스튜디오는 모든 작품에서 원색을 기피한다. 지브리에서는 ‘투명감이 있는 색’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는 채도가 높은 색으로 수수하면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자연의 색’이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이런 색을 컴퓨터 채색으로는 만들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걱정하는 전문가가 거의 한 명도 없는 현실이 바로 한국 애니메이션이다. 그나마 한국 애니메이션 뿌리는 단속을 피하며 대본소 만화책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게 얼마 전까지인데, 그것도 우리 어린이의 꿈을 통한 것이 아니라 수출하는 자동차 몇 대를 대신할 문화 상품으로 부활한 것이었다. 이런 경제 논리는 아름다운 꿈과 희망으로 만드는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다.

도마에 올린 어린이의 꿈은 머리와 꼬리가 잘린 채, 어느새 싱싱한 외국 애니메이션의 몸통만이 우리 입맛을 맞추고 우리 또한 거기에 익숙해진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한국 애니메이션이 더욱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선택되고 만들어져야만 한다. 한해 140편 이상을 만들고 겨우 12편 정도만 살아남는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과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이는 필수적이다.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어린이마저도 주민등록번호를 적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과연 누구를 위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한 투자자의 계산으로만 만드는 근래의 한국 애니메이션은 벤처 열풍 속에서 하루빨리 빠져 나와야만 한다. 그 다음부터가 진정한 우리 것으로 사랑 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보급 덕택에 누구나 컴퓨터를 이용해 애니메이션을 쉽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동안 능력과 상관없이 기득권의 방어막에 밀려 꿈도 펼 수 없던 수많은 인재들의 작품이 인터넷으로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인터넷 애니메이션 사이트의 87%가 일본 것으로 도배한 것이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도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의 싹이 움트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꿈을 하루빨리 어린이의 스케치북 속으로 옮겨야만 미래가 있다.

< 이용일/ 애니메이션 전문가,‘애니피아’ 대표 > modoris@yahoo.co.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