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지의 세상읽기]좀팽이科 남자

  • 입력 1997년 4월 12일 08시 22분


딸들이 화이트데이에 받아 온, 혹은 우송된 선물 상자를 보니 내용은 그냥 사탕이되 그 포장이며 장식이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밸런타인데이에 딸 애들도 그렇게 화려하게 장식한 초콜릿을 남자친구들에게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어쨌든 『마음에 있으면 무엇하는가. 전달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커뮤니케이션 우선의 시대인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은 여자에게 화려한 리본으로 장식한 사탕상자나 부케, 가방에 대롱대롱 매다는 인형 등을 선물하고, 생일은 물론 심지어 만난지 1백일째 날 같은 것까지 챙기고, 여자의 호출기에 시시때때로 온갖 시시콜콜한 내용의 메시지를 넣어주는 남자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 20대때의 기준으로 치면 꽤나 좀스럽고 남자답지 못한 남자, 여자에게 곰살맞게시리 낯간지러운 아부를 잘하는 거의 「좀팽이과」에 속하는 남자가 여자들에게 오히려 높은 점수를 딴다는 것이다. 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엔 옛날식 「터프가이」는 매력이 없다. 무뚝뚝한 것은 무능에 속한다. 자상한 남자, 여자의 마음을 섬세하게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남자, 그리고 그것을 재치 있게 표현할 줄 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표현할 수 없으면 무용지물…. 표현할 수 있는 마음과 아울러 이왕이면 크게 표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어야 능력있는 남자다. 그러니까 선물에 있어서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마음의 표시』라는 것은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마음가는데 돈 간다고 마음이 크면 그에 비례하여 선물도 커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전 신문의 설문조사에 요즘 젊은이들이 애인에게서 가장 선물받고 싶은 물건이 「휴대전화」라는 사실도 이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나 너 밥은 안 굶겨」가 청혼 비슷한 말로 통용되고 「저 정도면 내 딸 밥은 안 굶기겠다」가 장인이 사윗감을 인정하는 말로 통하던 「밥」의 시대가 지나고 바야흐로 「놀이의 시대」가 된 것이다. 요즘의 딸들은 「아버지의 밥」을 먹다가 「남편의 밥」을 먹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밥은 혼자서도 먹을 수 있지만 같이 「즐겁게」 살기 위해 결혼한다. 그러므로 남녀 모두에게 「일」과 「가정」은 똑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이다. 여자에게 있어 차차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되어가면서 매력적인 남자의 조건도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지금. 백번 마음에 있어도 여자한테 낯간지러운 소리는 죽어도 못한다는 소위 경상도 「재래종」 「토종」인 나의 남편,요즘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을리 없다. 안심이다. 최연지〈방송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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