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그대의 빈손

  • 입력 2006년 12월 29일 19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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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둑, 핏줄 선 주먹을 펴 보니 손 안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렇게 한 해가 갑니다. 미움이 있어 사랑 또한 있겠으나 올 한 해 우리 사회를 휩쓴 ‘증오의 바이러스’는 치유(治癒)하기 힘든 상흔(傷痕)을 남겼습니다.

있는 이들은 있는 이들대로, 없는 이들은 없는 이들대로 성난 얼굴입니다. 모두들 억울하고, 배 아프고, 기막히다고들 합니다. 아파트 값이 몇 년 새 두세 배 올랐어도 껑충 뛰어오른 종합부동산세가 불만스럽고, 어느 동네는 5억∼10억 원 올랐는데 우리 동네는 1억∼2억 원밖에 안 올랐다고 억울해합니다. 한쪽에서는 수억 원씩 집값이 올랐는데 종부세 수백만 원이 아까우냐고 삿대질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누가 집값 올려 달라고 했느냐, 10∼20년 한 아파트에서 살아왔는데 부도덕한 투기꾼 대하듯 세금폭탄 때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분노합니다.

‘너의 생각’에 대한 존중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변영로 ‘논개’)고 했습니다. 그러나 갈가리 찢긴 세상에서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몸을 던진 논개의 ‘거룩한 분노’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상처 주고 상처 받는 날선 말들과 성난 얼굴들만 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갈등과 미움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공동체가 견뎌 낼 수 있는 임계(臨界) 수준을 넘지는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국정의 리더십이요, 정치의 본분입니다. 내일의 비전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실행을 통해 작은 성과나마 국민 개개인의 삶에 와 닿게 해야 합니다. 미래의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협력하자고 설득하고 동의를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개혁이든 청산이든 비용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 비용이 내일을 위해 불가피하다면 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일이 아닌 과거로의 회귀(回歸)요, 한풀이라면 비용의 생산성은 떨어지고 극심한 적대와 분열, 증오의 바이러스를 확산시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난 4년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때때로 관용에 대해 얘기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하자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줄곧 ‘나의 생각에 대한 존중’을 그 기준으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대통령 먼저 ‘너의 생각에 대한 존중’을 하기보다는 왜 나를 존중하지 않고 구박하느냐는 섭섭함과 분함에 갇혀 있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북한 핵이 해결될 때까지라도 효율적인 안보를 위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미루고 한미연합사 체제를 유지하자는 군 원로들의 의견에 “별 달고 거들먹거렸느냐, 부끄러운 줄 알라”고 거친 말을 하겠습니까? “그동안은 참았는데 앞으로 할 말은 하겠다”고 성마른 소리를 하겠습니까? 줄곧 언론 탓을 하겠습니까?

누구는 ‘애정결핍증’에 빠진 대통령을 칭찬하자고 합니다. 더는 성내지 않게 달래자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대통령에 대한 위로가 아닙니다. 모욕에 가깝습니다. 대통령 스스로 ‘분노의 덫’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이 위임한 임기의 마지막을 상대의 생각부터 존중하는 ‘진정한 관용’으로 정리하고 마감해야 합니다.

제 몸 찌르는 ‘원한의 칼’

법정 스님은 “증오라는 원한의 칼로 남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 칼이 자기 자신을 먼저 찌르지 않고는 맞은편에 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선승(禪僧)의 잠언(箴言)을 새겨야 합니다. 하여 적대와 단절에서 화해와 소통으로 세상의 물길을 터야 합니다. 변하지 못한다는 대통령 탓만 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증오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새해는 대통령 선거의 해입니다. 정파 간 대립과 다툼이 소용돌이칠 것입니다. 세상을 바로 세우는 ‘거룩한 분노’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맹목(盲目)의 증오는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 좌우 극단주의자들의 선동에 휘말린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전장(戰場)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만은 배격해야 합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이름으로. 새해, 우리들의 빈손은 그렇게 채워 가야 합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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